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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고립청년 릴레이 인터뷰_#15: 세계(1)



좋으면서 싫고, 싫으면서 좋은

힘들지만, 버티며 살아온 나의 세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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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자기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음. 다른 분들 인터뷰 읽어보니까 소개를 다들 되게 멋있게 하더라고요 저도 한번 생각을 해봤는데…. 

한평생 많은 어려움을 겪고 살았지만, 여전히 버티고 사는 세계라고 합니다. 



해 주실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자기소개네요. 

평소에 좋아하시는 것이나 관심 있으신 것 있으세요?


많았는데 다 시들해졌어요. 원래 좋아하는 게 많아서 삶을 간신히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는데, 

지금은 다 흥미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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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굳이 내가 좋아해야 되나 





최근에 더 그러신 건가요, 아니면 최근에 더 그렇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이게 설명하기가 좀 복잡한데 옛날에는 무조건 나를 위로해 주고 달래준다고 생각하면서 좋아하는 것들이 지금은 뭔가 어두운 일면들이 있다는 거를 알고 나서부터는 좀 불편해졌다고 해야 할까? 


구체적인 예를 들어야 이해가 쉬우실 거예요. 

예를 들자면 저는 원래 영화를 되게 좋아했어요. 진짜 좋아했거든요. 영화를 엄청 좋아하고 극장에 자주 영화관에 자주 가고 그랬는데 어느 날 종편에서 하는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을 보는데, 거기서 영화관 바닥에 휘날리는 먼지나 위생 실태에 대해 나왔어요. 영화관에서 균 배출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게 얼마나 인체에 유해한지도 다 보여줬어요. 그동안 ‘내가 이걸 왜 좋아했지?’라는 회의감이 들었어요. 


제가 실제로 인터넷 보안을 되게 철저하게 하기 때문에 한 번도 해킹을 당한 적이 없는데 넷플릭스에서 유일하게 해킹을 당한 경험이 있어요. 요새 매사가 이런 식으로 돌아가요. 

여태까지는 즐거움을 많이 줬던 것들이 알고 보니까 어두운 일면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래도 계속 좋아해야지.’ 이게 잘 안돼요. 마음이 시들해지는데 이걸 굳이 내가 좋아해야 되나 이런 마음이 있죠. 

요즘 들어서는 뭐랄까, 내가 좋아했던 많은 엔터테인먼트가 다 타락했다는 생각도 들고요. 



좋아하는 영화 분야도 어두운 일면, 

부정적인 부분들을 아시게 된 이후로는 영화에도 마음이 시들해지셨다는 거네요. 맞나요?


성격인가 봐요. 제 성격이 이런 안 좋은 게 있지만 그런데도 나는 계속 여기서 즐길 거는 즐긴다 이게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아마 살면서 겪은 트라우마 때문에라도 더 부정적인 면이 크게 부각되시나 봐요. 


네, 충격이나 부정적인 것들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그러면 요즘은 영화 잘 안 보세요. 집에서 넷플릭스로 볼 수도 있잖아요. 


극장에 안 간 지 거의 한 달 반 넘었는데 이게 최장 기록이에요. 정말 자주 갔거든요. 

넷플릭스로는 보고 있어요. 



영화 자체를 되게 좋아하시나 봐요. 어떤 장르를 좋아하세요?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거의 다 봐요. 영화관에서 불 다 꺼놓고 대형 화면에서 2시간을 틀잖아요. 영화관의 압도적인 사운드하고 큰 화면에 넋을 잃고 보다가 나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순간이 와요.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 딱 불이 켜지고 극장 밖으로 나갈 때 상쾌함이 있어요. 그 맛으로 영화관을 다녔죠. 사실 영화는 집에서 비디오로도 볼 수 있고 DVD로도 볼 수 있고 넷플릭스로도 볼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 감은 오직 극장에서만 나오니까요.

 


그렇죠. 영화관의 환경이 다르죠. 압도적이고 몰입되는 것에 집중하고 즐기시는 것 같아요. 


제가 긍정심리학인가 하는 책을 샀는데, 거기에 심리학자 중에 칙센미하이라는 사람을 소개했는데 그 사람은 평생 몰입을 연구한 사람이에요. 몰입으로 인해서 삶이 행복해지고 몰입의 경험이 있어야 삶의 질이 올라간다고 주장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여러 가지 몰입의 예를 들었어요. 중요하게 생각된 것이, 가장 쉽게 특별한 기술 없이 할 수 있는 몰입이 극장에서 영화 보는 거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런 면에서 저는 실천을 제대로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보기, 그 몰입의 즐거움을 인정해준 ‘긍정의 심리학


영화보기, 그 몰입의 즐거움을 인정해준 ‘긍정의 심리


영화보기, 그 몰입의 즐거움을 인정해준 ‘긍정

영화보기, 그 몰입의 즐거움을 인정해준 ‘긍정의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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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력이 좋은 게 축복일 때도 있지만 사실 축복이 아닌 경우도 많죠





그러네요. 세계님 말씀 들으니까 저도 조만간 영화관에 가서 직접 빵빵한 사운드와 큰 화면으로 

좋은 영화 한 편 보고 싶네요. 세계님의 얘기에 저도 몰입되었어요.

왠지 세계님은 영화 분야에 전문가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영화를 잘 볼 줄 알고 잘 소개할 줄 알면 그것만 해도 전문가죠. 영화를 소개하는 직업들도 생겼잖아요.

그런 거 하셔도 잘하실 것 같아요. 


사실 이런 얘기는 처음 하는데, 대학 졸업하고 막연하게 미국 영화 직배사에 취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워너 브러더스, 디즈니 코리아 같은 곳에요. 



잘 맞으실 것 같아요. 

관심도 있으시고 또 그동안 많은 영화도 섭렵하셨으니까 일에도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네, 제가 대학교 4학년 때 CJ에서 저희 대학으로 취업설명회를 왔는데 제가 손들고 물어봤어요. 영화 배급하는 쪽의 부서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냐고 물어봤던 적이 있었어요. 유일하게 갔던 취업설명회였어요. 



아, 엔터테인먼트 사업부요? CJ도 예전보다 엔터테인먼트 사업부가 엄청나게 컸잖아요.


그게 2009년이었는데, 일단 적성 검사 후에 부서 배정이 되는데 엔터테인먼트 부서에 배정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가 않고 엔터테인먼트 부스에 배정되는 사람도 대부분 방송 채널 쪽이고 영화 배급 쪽으로는 배정이 잘 안 된다고 답을 하더라고요. 근데 그때만 해도 2009년이니까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다를 거예요. 



그쪽으로 정말 한번 도전해보셔도 저는 좋겠다는 느낌을 막 받았어요. 


이제는 너무 늦은 것 같아요. 



왜요? 사람의 수명도 길어지고 일할 수 있는 나이가 되게 길어졌잖아요. 

자기가 관심 있고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건 좋은 것 같아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요즘은 주로 집에서 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상담받으러 가고 일주일에 한 번씩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이 있어요. 

아침 산책도 계속하려고 해요.



양천구에 진짜 큰 공원이 많아서 산책하기가 참 좋더라고요.

집에 계실 때는 영화 보시는 거 말고는 또 주로 어떤 것을 하면서 시간을 좀 보내시는 편이세요?


책을 읽으려고 노력을 하죠. 저 자신을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바꿔보고 싶어서 이 책, 저 책 읽는 데 효과는 없는 것 같네요. 

읽을 때는 엄청나게 도움이 느껴지고 유용한 정보가 있으면 줄도 치고 그러는데요. 

현실 적용을 할 때는 한 개도 되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책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현실 적응을 하려고 하면 그냥 본능대로 화가 나고 본능대로 열 받고 본능대로 

나한테 상처를 주는 걸 곱씹게 되는 식이니까요. 근데 소설은 안 읽어요. 



소설은 안 읽으세요? 너무 허구라서요?


그건 아니에요. 제 독서 습관이 순서대로 안 읽거든요. 

중간부터 읽었다가 끝으로 갔다가 처음으로 계속 이것저것 훑어보면서 페이지는 다 채우는데 

그 순서가 이제 뒤죽박죽 왔다 갔다 읽으면서 내가 원하는 정보를 챙기는 방식으로 읽거든요. 

그런데 소설은 그렇게 읽을 수가 없죠. 



그렇죠. 순서대로 읽는 것이 좋죠.


그게 안 맞아서 안 읽는 거지 소설을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대신 에세이 같은 건 읽어요. 



네~ 저는 세계님의 머릿속이 정리가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책을 통해 얻은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기억에 오래 남기시는 것 같아요. 기억력이 좋으신 것 같아요. 


얼마 전에 별청년 프로그램할 때도 기억력이 좋은 것이 제 장점이라고 말했어요. 



역시 제가 세계님을 잘 봤군요. 


잘 보셨어요. 그런데 기억력이 좋은 게 축복일 때도 있지만 사실 축복이 아닌 경우도 많죠. 

과거의 트라우마가 많아 기억 속에 계속 남아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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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으면서 싫고, 싫으면서 좋은 나의 할머니

 



계속 잊으려고 해도 잊히지 않는, 안 좋은 기억들이 많이 있으신가요?


참 애매한 부분인데요. 저는 솔직히 말하면 잊어보려고 해본 적이 없어요. 계속 곱씹었고 저 스스로 상처 준다는 걸 알면서도 언젠가는 갚아주겠다는 생각으로 살았어요.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곱씹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언젠가는 갚겠다는 생각으로 살았어요. 사람이 살다가 너무 억울하면 자꾸 곱씹고 그 상황으로 돌아가서 자꾸 생각하게 되잖아요. 


어릴 때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원래 제가 삼청동에 살았어요. 여기서 멀지 않아요. 삼청동에 살다가 갑자기 상황이 안 좋아져서 88년도에 구로로 옮겼어요. 거기서 어머니가 약국을 개업하셨고 저는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때까지 다 구로에서 지냈죠. 



그럼 초등학교 때 구로로 이사 가셨나요? 


아니죠. 초등학교 들어가기 직전 유치원 시절에요. 당시 지금도 이미지가 좋은 동네는 아니지만, 당시 구로는 사실 정말 진짜 슬럼이었거든요. 90년대는 진짜 그랬거든요. 아무래도 교육 환경이 제일 문제였죠. 학교에서는 애들이 많이 놀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 또 문제가 있었는데, 제 방이 없었어요.

할머니가 집안 살림을 도와주길 거부하셔서 없는 살림에 생활비를 쪼개서 가정부를 두었어요. 방은 3개인데 1개는 부모님이 쓰시고 가정부가 따로 쓰고, 저랑 할머니랑 방을 같이 쓰니 제 개인 공간이 없었어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그렇게 살았어요. 할머니는 불교에 완전히 미친 분이었는데 여름과 겨울에 꼭 3개월씩 절에 가서 지내다 오니까, 그나마 1년 중 절반은 저 혼자 쓰고 나머지 반은 할머니랑 사용했어요.






“할머니는 부처님을 믿는다는 사람 행실이 왜 그따위입니까?”





할머니는 절에 들어가서 살다 나오시는 거예요?


그게 뭔지 몰랐는데 나중에 할머니가 죽고 나서 알았어요. 

불교에서 왜 동안거, 하안거 수행이라는 게 있는데 거기에 스님들이 수행할 때 할머니처럼 노보살들, 여성 노인 신도들이 돈 좀 내고 들어가서 같이 수행하는 거예요. 그 정도로 할머니는 불교에 미쳐 있는 분이었는데 저랑 할머니랑 같이 지내는 방에 불당과 불상이 있었어요. 할머니는 성격이 좀 이상했어요. 


최대한 순화해서 표현하면 많이 모가 난 부분이 있었어요. 그래도 저한테 나쁘게 하진 않았어요. 저를 못되게 학대한 것도 아니었고요. 오히려 저를 이제 맏아들의 손자니까 장손이라고 되게 사랑했는데, 문제는 이제 할머니의 평소 생활하는 방식이 너무 부정적이니까 나도 모르게 그거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에 우리 약국에 허드렛일을 해 주시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어느 날은 그 아저씨가 참다 못해서 할머니한테 삿대질하면서 화를 냈어요. 


“할머니는 부처님을 믿는다는 사람 행실이 왜 그따위입니까?”


라고 제가 보는 앞에서 한 5시간 서로 막말을 하면서 싸운 거예요. 

그러고 나서 그 아저씨가 엄마한테 저를 할머니랑 따로 떼어놔야 한다고 했대요. 

틀림없이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예언하듯이 얘기하면서. 


할머니는 항상 피해의식에 젖어있었어요. 뉴스 보면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욕하고 대통령 욕하고 매일 그랬으니까요. 가정부 아줌마들이 들어오면 다들 할머니 때문에 못 견디겠다고 나가니까 어머니에게 그것도 아주 큰 애로사항이었어요. 그리고 근데 문제는 제가 중학교 때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들어오면 집에서는 좀 편하게 쉬고 싶은데 쉴 수가 없었어요. 집에 들어오자마자 할머니는 아줌마 때문에 못 살겠다고 저한테 하소연하고, 아줌마는 할머니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하소연을 해요. 제가 언젠가는 너무 화가 나서 할머니랑 아줌마를 불러다 놓고 ‘둘이서 싸우든가 말든 알아서 하십시오.’ 하기도 했어요. 


어쨌든 할머니는 되게 이상한 분이었어요. 근데 그게 이상하다는 걸 모르고 살았어요. 왜냐하면, 다른 집 사정을 모르니까요. 비교 대상이 없으니까 원래 그런 줄 알고 살았는데 나이가 스무 살 넘고 나서 머리가 커지고 이제 딴 집을 인식하게 되면서 제가 제일 충격받은 사건이 있었어요. 다른 집 할머니는 맨날 집안 살림도 도맡아 하고 손주한테 맛있는 것도 사주면서 손주를 어르고 달래면서 자기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집이 많다는 거예요. 우리 집 사정하고는 너무 다른 사정이었고 우리 할머니는 이 기준에서 완전히 이상한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어요. 그러고 나서 보니까 진짜 우리 할머니 같은 사람은 없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그래서 그때부터 점점 대들고 싸우기 시작했고 할머니 돌아가시기 5년 전부터는 아주 심하게 싸웠어요. 할머니 돌아가시기 5년 전이면 제가 한창 대학 다니던 시절인데 그때는 많이 싸웠어요. 나중에 정말 위험한 순간도 있었어요. 갈 데까지 간…. 저는 너무 스트레스가 많은데 할머니는 자꾸 저를 자극하니까 제가 할머니 멱살을 확 잡고 위협한 적도 있어요. 다행히 할머니는 그 사실을 아버지한테는 비밀로 했기 때문에 조용하게 넘어갈 수 있었어요. 


이후에 할머니와의 문제가 극적으로 해결되는 순간이 왔는데, 겨울에 할머니가 화장실에 가다가 미끄러져서 넘어진 후에 뼈에 약간 금이 갔고 요양원에 들어가시게 되었어요. 요양원에 들어가시고 1년 반 만에 돌아가셨어요.



아, 그러셨구나. 어르신들이 넘어져서 다치는 게 되게 위험하다던데…. 

결국 할머니는 세계님을 아프고 힘들게 한 분이셨나요?


아무래도 양가감정이 많죠. 좋으면서 싫고, 싫으면서 좋은…. 

그런데 싫은 게 조금 더 강한 것 같긴 해요 그러니까 너무 좋은 게 한 49면 너무 싫은 게 51이에요. 



그래도 할머니가 세계님을 손주로서 아끼고 좋아하는 마음을 느끼기도 하셨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할머니가 결과적으로 나한테 끼친 영향은 정서적으로 너무 부정성을 많이 심어줬다고 생각하거든요. 할머니하고 같은 방에서 지내면서 원활한 인간관계를 배울 수가 없어서 많이 원망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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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 싫은 학교, 절망 속 3년 



좀 전에 학교에서 친구들한테 안 좋은 일을 경험하셨다고 하셨는데 어떤 일이었나요?


초등학교 6학년 때(‘95년도)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3년간 제일 지옥 같았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이 저를 싫어했어요. 

요즘 같으면 고발할 수도 있는 사안인데 그때만 해도 그 개념이 없었어요. 선생님들의 권위가 되게 강했죠. 



그냥 이유 없이 싫어하시는 거예요?


그건 아니에요. 제가 찍힐 일을 했어요. 



그래도 선생님이 학생을 싫어했다는 게 조금 이해가 안 되긴 하는데요.


그러니까 이제 그 선생이 아주 야비한 인간이었어요. 당시에 저한테 어떤 부당한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이 돼요. 저를 건드려서 성질이 나서 저도 모르게 욕을 했어요. 그랬더니 선생이 뭐라 그랬냐고 다그쳤고 저는 겁이 나서 아무 소리도 안 했다고 발뺌하다가 씨~까지만 말했다고 궁색하게 변명을 했더니 나한테 별명을 붙이더라고요. 씨군이라고. 그 이후로 애들도 다 그렇게 부르며 놀렸어요.



뭔가 꼬투리를 잡으신 느낌이 드네요. 


정말 쓰레기 선생이라고 생각해요. 너무 과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적으로 만날 기회가 있으면 바로 죽이고 싶을 정도예요. 

왜냐하면, 저는 어렸고 마음도 여려서 상처도 쉽게 받을 수 있을 때잖아요. 



당시에는 선생님이 되게 큰 존재잖아요. 대항하기 어려우셨을 것 같아요. 


대항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라떼같이 돼 버리는데,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엄한 선생님들은 애들 뺨을 때리기도 했어요.



맞아요. 그때 폭력적인 선생님들도 있었어요. 

선생님이 학생에게 안 좋은 의미를 부여해서 별명을 붙여 부르셨다는 것은 세계님한테 무척 힘든 일이었을 것 같아요. 


저는 차라리 그 자리에서 맞는 게 나았을 거로 생각해요. 

그거는 정말 두고두고 상처가 되고 차라리 그 자리에서 한 대 맞고 마는 게 낫지 그거는 정말 용납할 수 없어요. 



그렇게 불릴 때마다 마음에 상처가 크셨을 것 같아요.


선생이 별명을 한번 만들어 붙이고 두세 번 정도 부르고 나니까, 그다음부터는 자연스럽게 애들이 다 놀리는 식이 되었죠.



선생님께 그렇게 부르지 말아 달라고 얘기하시기 어려우셨죠? 


그때는 그게 어렵죠. 선생한테 정당한 요구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시절이었죠. 



맞아요. 마치 어른에게 토를 단다고 더 크게 혼났을 수도 있겠네요. 

학창시절에 힘들었던 일이 그런 일이었군요. 


얘기하려면 한도 끝도 없죠. 중학교 때로 들어가면 이제 더 문제가 많죠. 왜냐하면, 초등학교 6학년 때 완전히 기가 꺾인 상태에서 중학교에 들어가는데 거기가 이제 아시다시피 90년대 후로는 슬럼이라고 그랬잖아요. 면학 분위기도 상당히 안 좋았고 굉장히 불량한 애들이 많았어요. 거기서 많이 당했죠.



의기소침한 상태로 중학교에 올라가서 친구 관계가 좀 어려우셨나 봐요. 


친구 관계가 어려웠다는 말 정도로는 설명이 되지 않은데, 일단 친구가 한 명도 없었고요. 사귀고 싶은 친구도 없었어요. 애초에 말하고 생각하는 수준 자체가 완전히 달랐어요. 실제로 애들이 완전 양아치에요. 온종일 얘기하는 주제와 내용이 같잖아서 들을 수 없는 수준인데, 말을 섞기가 싫고, 말을 안 섞으면 또 자연스럽게 소외가 되고, 더 괴롭히는 새끼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런 것들이 좀….



3년 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실 때, 조금이라도 힘이 됐다거나 그 시간을 지날 수 있게 만든 것이 있었다면 무엇이었나요?


전혀 없어요. 절망 속에서 3년을 다녔어요. 버틸 힘이 되었던 것도 아무것도! (고개를 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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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이 다 고통이다’




너무 힘드셨겠어요. 


선생님한테도 무수히 일러바쳤거든요.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나를 싫어하는 놈들인데 고자질쟁이라고 생각하든 말든 관심도 없었고, 선생님한테 이르니까 선생님들 반응은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는 식이어서 선생님들에 대해서 굉장히 화가 났어요. 



학생이 고통을 호소하는데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니 말이 안 되네요. 

그러면 선생님들은 전혀 개입해 주시지 않으셨어요?


네, 학생보고 그냥 괴롭힘당하면서 살거나, 알아서 싸움을 배워서 해결하라는 건데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냔 말이에요. 학교에서는 당연히 선량한 학생들을 보호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는 건 선생들의 극도의 이기주의죠. 저는 이해하기도 감당하기도 힘들었어요.



학교 안에서 선생님들이 보호자가 되어 주셔야 하는데….


역할을 못 한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안 했던 것 같아요. 

그냥 자기 일이나 하면 된다, 자기 가르치는 거나 가르치면 된다는 사고였던 것 같고, 정말 정말 화가 났어요. 



그러셨겠어요. 그 당시에 학교는 정말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을 텐데 어떠셨어요?


제가 결국 멘탈이 무너져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약을 먹기 시작한 거죠. 조금 미신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할머니가 불교에 미쳤다고 그랬잖아요. 저도 맹목적으로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믿었어요. 할머니도 굉장히 만족했어요. 할머니가 원하는 대로 따랐는데, 언젠가부터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불교를 믿어봤자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할머니랑 저랑 같이 쓰는 방에 불상이 있었는데, 그 불상에 절을 하고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않게 해달라.’ 고 기도를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고 더 심해지는 거예요. 중학교 1학년 때는 할머니 권위로 조계사에 청소년 학생회에 나갔는데, 거기 나가도 좋아지는 게 없고 교우 관계가 더 나빠지니까 좀 회의가 들더라고요. 중학교 2학년 때 청구역에서 무료 청소년 상담을 받은 적이 있는데 상담 선생님이 자기 딴에는 위로를 한다고 한 말이 너무 큰 충격이었어요. 불교에서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말을 해 주더라고요.



일체개고요?


네, ‘모든 것이 다 고통이다.’라는 뜻이라고 설명을 하는데, 저는 그때 확 반감이 들었어요. ‘이게 뭐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이제 할머니 따라서 절에 다녔지만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봤거든요. 나중에 불교책을 읽어보니까 불교의 중요한 교리 중 하나더라고요. 근데 그 이야기를 듣고 엄청난 반감이 들면서 ‘모든 게 고통이니까 그냥 이렇게 당하고 있으라는 건가? 그런 게 불교 가르침이라면 난 불교를 믿지 않겠다.’라고 속으로 생각했어요. 


그러고 나서 중3으로 들어가던 시점에 우리 집에서 일하던 아주머니에게 알아봐 달라고 부탁해서 교회를 다니게 됐는데, 교회 다니고 6개월간은 너무 신기하게 일이 잘 풀려서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98년에만 해도 전학이 어려웠거든요. 교회 다닌 지 얼마 안 돼서 어머니가 약국 단골한테 우리 애가 학교에서 이런 어려운 일들을 당하니까 전학을 할 수 있게 주소를 좀 옮겨달라고 하고 부탁했어요. 매달 사례를 하고요. 그래서 구로에서 영등포에 있는 학교로 전학할 수가 있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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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렇게 고통스러운 인생이라면....



멀지 않은데도 그렇게 차이가 있었네요. 


네, 옆 동네인데도 훨씬 낫더라고요. 그리고 더 좋았던 건 제가 원래 다니던 중학교 체육 선생님이 있었어요. 체육 과목만 가르치는 선생님이니까 저랑 따로 깊은 얘기를 주고받을 기회는 없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도 저를 좋게 생각해주셨어요. 그 체육 선생님이 제가 전학 간 학교로 전근을 가서 제 담임이 되신 거예요. 



아, 정말요?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된 건가요?


우연이었어요. 그래도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 신기한 일이죠. 



너무 다행이었네요. 


선생님이 앞으로 제가 잘 학교생활을 편하게 잘 케어해 주겠다고 하셨어요. 



정말 고마운 선생님이시네요.


6개월간은 일사천리로 풀렸어요.  너무 일사천리로 잘 풀려서 순탄한 생활을 하다가 교회에서 여름 수련회를 갔는데 거기서 조금 틀어지는 일이 있어서 그 이후로는 교회에 안 갔어요. 



그래도 교회 가고 나서 한 6개월 정도는 좋은 변화들도 생기고, 위안이 되셨겠어요.


위안이 됐지요. 근데 그때는 위안이 됐다고 느낄 겨를도 없었어요. 

왜냐하면, 학교라는 곳에 완전히 질려 있어서 중3 생활이 중 1, 2 때보다 더 편했다고 해도, 얼른 빨리 졸업해서 더 이상 이 꼴 저 꼴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중학교 졸업한 이후로 더는 학교에 안 다니고 검정고시 보겠다고 하니까 부모님이 굉장히 반대하셨죠. 

그래서 결국 타협을 한 게 1년 휴학하고 들어간다는 거였어요. 1년 동안 추스를 시간을 주고 고등학교에 간다.! 

타협책이었죠. 그래서 서로 동의를 했고, 1년 동안 많은 경험을 했어요. 

캐나다 어학연수를 다녀오기도 하고 테니스를 배우기도 했어요. 재미있는 경험들이었어요.


근데 문제는 이제 2000년 3월에 다시 고등학교 1학년으로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못 있겠다, 하루도 못 버티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요. 무슨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도 못 버티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트라우마 같은 게 생기셔서 그럴까요? 옛날에 힘들었던 기억 때문에?


옛날에 트라우마들이 깊게 남아 있어서 그렇죠. 그래서 도저히 이 학교는 다닐 수 없고 이미 1년을 쉬었고 다니겠다고 약속을 했고 고심 끝에, 제가 날짜도 기억해요. 2000년 3월 14일인데, 저한테 약이 한 움큼 있었거든요. 정신과 약이 한 움큼 있었는데 한 달 치 넘었어요. 학교 갔다가 오자마자 꾸역꾸역 다 입에다 넣었어요. 가지고 있는 약을 모두 다 넣었어요. 말 그대로 자살 시도를 한 거죠. 깨어나 보니까 한 3일 지나 있더라고요. 



너무 위험했네요.


위 세척을 하고 링거를 꽂고... 

나중에 의사한테 물어보니까 솔직히 위험한 고비가 있긴 있었다고 말을 하더라고요. 

적정량이라는 게 있는데, 그 이상이 되면 치사량이 될 수 있으니까요. 

애초에 치사량을 먹고 죽으려고 했으니까요. 



그 정도로 고통스럽고 힘드셨어요? 

부모님께 그 힘든 마음을 좀 얘기해보셨으면 어땠을까요? 

나 이 정도로 힘들어서 학교에는 도저히 못 가겠다 하고요. 


아시다시피 우리 사회가 그걸 용납하지 않잖아요. 



어쨌든 ‘학교는 졸업해야 한다.’ 이런 거요?


네, 그래서 저는 1년을 쉬고 반드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겠다고 약속을 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뭐 이렇게 저렇게 말하기도 그렇고 그랬어요. 그냥 이렇게 고통스러운 인생이라면 죽어야겠다고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는 속만 버리고 죽지 못했지만….



다시 깨어나서는 어떠셨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깨어나서 일단 폐쇄 병동에서 재활하고 4월에 퇴원해서 두 달 정도 더 학교에 다니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5월 말에 엄마한테 얘기했어요. 더는 못 다닌다고 울며불며 얘기했어요. 공식적으로는 고등학교 1학년 7월 초에 자퇴하고. 2001년 4월에 검정고시에 합격해서 합격증을 받았어요. 


그다음에는 딱히 계획이 없었어요. 사실 원래는 지금까지 살아내는 것만도 힘들었는데…. 

딱히 계획이 없다가 세브란스에 낮 병원이 있어서 어머니의 권유로 다니게 됐죠. 거기 다니면서 2001년에 남은 기간을 보내고 2002년부터는 이제 수능을 도전했죠. 저도 사실 대학에 가고 싶었는데, 고등학교 한 학기도 안 된 상태에서 자퇴했기 때문에 수학 기초가 너무 부족한 거예요. 요즘 같으면 수포자도 적당히 중하위권 레벨 대학에 들어갈 수 있어요. 저 때만 해도 공통 수학, 공통 과학 같은 기본적인 거를 안 하면 성적이 아예 안돼서 못 갔어요. 2002년도 수능이 딱 그랬거든요. 영어, 국어, 사탐은 잘 나왔는데 과학, 수학, 과학 과목에서 그냥 찍어도 될 점수보다도 못한 점수가 나왔어요.


지금도 다 기억하는데 수능 점수 가지고 중앙대, 동국대, 국민대 썼는데, 중앙대, 동국대는 한 큐에 바로 아웃되고 국민대는 대기 번호 50번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희망 고문을 하며 기다렸는데 결국 제 차례가 안 오더라고요. 그렇게 대학에 떨어지고 났는데 시간은 많으니까 쉬엄쉬엄하면서 다시 수능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던 와중에 2003년 여름에 갑자기 알지 못할 병에 걸렸어요. 



수능 그러니까 재수를 준비하시면서요?


재수를 준비한 건 아니고요. 2003년은 그냥 쉬고 2004년부터 다시 어떻게든 재수를 준비하려고 했는데 제가 청소년기부터 약을 오랫동안 먹은 기록이 있으므로 군 면제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시간은 많으니까요. 어떻게든 대학은 가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떨어진 해는 조금 쉬고 그다음에 계속 준비를 해서 어떻게든 대학을 가야겠다. 생각하는데 문제는 2002년 수능에 떨어지고 2003년 여름에 갑자기 무슨 이상한 병에 걸렸어요. 그 병은 원인도 몰라요. 



병명이 뭐였는데요?


증상은 속이 너무.... 위장이 제가 뭘 먹었는데 갑자기 꾸르륵대더니 아파요. 근데 죽을 듯이 아파서 내시경을 하잖아요. 

그런데 이상이 없다고 하니 미치겠더라고요. 



통증은 있는데요?


증상이 있는 정도가 아니고요. 심각한 수준이었어요. 내시경을 해도 아무것도 안 나오고…. 틀림없이 전에 약을 먹고 죽으려고 했던 게 뒤늦게 나타나는 거라고 짐작은 되는데 어쨌든 검사에서는 안 잡히고 이상이 없다고 하니까 미칠 노릇인 거죠. 그렇게 위가 아프다고 뒹굴면서 살면서 3년이 지나가서 시간이 저절로 낭비됐어요. 47kg까지 빠졌어요. 너무 답답했어요. 뭔가 지금도 생각하면 아직도 열 받네요. 



3년 동안 힘드셨겠어요. 속이 아픈 게 정말 고통스럽잖아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3년을 그랬다면 정말 힘드셨을 것 같아요.


지금 제 표정은 그대로인데 속에서는 눈물이 나요. 


/




 대학 생활, 새로운 기회를 찾아서….





제가 궁금한 게 혹시 은둔과 고립의 경험을 가지고 계시니까 혹시 그때 이야기를 좀 해 주시겠어요? 


근데 이게 진짜 애매한 문제인데, 저는 인터뷰하셨던 다른 분들하고는 좀 달라요. 은둔과 고립의 기준을 어디에 넣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제가 대학교를 잘 졸업하고 나서 완전히 번 아웃이 왔어요. 인간관계 다 질리고 다 싫고 다 혐오스럽고 그랬어요. 그때가 딱 일반 핸드폰 2G에서 스마트폰으로 바뀌던 시기거든요. 제가 새 스마트폰을 살 때 옛 연락처를 다 지워버렸어요. 

 


관계를 끊고 싶어서 그러셨나 봐요.


만약 고립된 세월을 은둔의 기준으로 잡으면 10년은 넘었죠.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에 갇혀서 안 나오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저는 하루도 은둔한 적이 없어요. 늘 나와 있고 늘 쏘다녔어요. 그렇게 하라고 해도 답답해서 못해요. 아마 이틀도 못 견디고 뛰쳐나올 거에요. 지금은 그 부분(고립)보다는 일단 제 힘들었던 과거에 대해서 먼저 얘기할게요.



네네, 그러셔도 괜찮아요. 대학에서는 어떤 전공을 하셨나요?


영문과였어요. 

 


영어나 어학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정확히 말하면 어학은 아니었고 미국 문화 쪽에 관심이 있었어요. 

 


대학 생활은 어떠셨어요?


위장이 조금 호전되긴 했지만 완벽하게 낫지 않은 상태에서 입학했어요. 

그 과정이 험난했는데, 그냥 험난한 정도가 아니었죠. 

 


3년 동안 위장이 아파서 힘들었다고 하셨는데 그 과정 중에 대학을 입학하셨네요? 


그렇죠. 이제 첫 학기는 계속 아팠죠. 하도 아프니까 집에서는 너무 늦어지면 곤란하다고 하고, 그런데 아픈데 수능을 볼 수가 없잖아요. 



그렇죠. 공부에 집중하기가 어렵죠. 


그런데 자꾸 늦어지니까 저 자신도 위기감을 느끼는 거예요.

일단 들어가긴 가야 하겠는데….



그때는 미래에 대해 좀 불안함이 좀 있으셨나 봐요?


제도상의 문제도 있었어요. 그때는 4년제 대학에서 검정고시 성적은 수시로 안 받아줬어요.

 


정시만 가능했군요?


네, 학생부 성적으로 인정을 안 해 주는 거죠. 나중에 뉴스를 보니까, 제가 입학하고 나서 3, 4년 후에 학생들이 헌법재판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얘기를 듣긴 들었는데 그때는 그게 안 됐어요. 어쩔 수 없이 수시를 받아주는 곳으로 입학을 일단 하고 나중에 더 좋은 대학으로 편입을 하는 쪽으로 플랜을 짤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입학은 전문대부터 시작했죠. 그래서 전문대 졸업하고 편입시험을 봐서 국민대학교 3학년으로 입학해서 졸업하면서 결국 4년간의 대학 생활을 다 마쳤어요. 겉으로 보기엔 편하게 말을 하지만 4년 동안 완전히 번 아웃이 왔다고 할 수 있어요. 



아까 몸이 불편하셨던 것 외에 대학 생활에서 어려운 점이 있으셨어요?


전문대에 들어갔을 때, 저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는데 한 명은 동국대 다니다가 잘려서 새로 입학한 사람이었거든요. 제 인생에서 만난 사람 중에 제일 재수 없는 사람 중 한 명이었고, 한 명은 1학년 2학기 때 처음 만났는데 처음엔 좋아 보였는데 나중에 그 사람이랑 완전 원수가 됐죠. 또 한 명은 여학생인데 저하고 안 맞아서 정말 갈등이 많았어요. 



다 같은 학과 동기생들이었나 봐요. 그 이후에는 어떠셨어요? 


번 아웃이 오고 지쳐서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좀 웃긴데, 그때는 남은 시간 동안 놀면서 즐기다가 서른 딱 됐을 때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고 나서 졸업을 하려고 하는데 부모님이 ‘그래도 여기서 끝내긴 너무 아까운데 원래 했던 대로 편입을 해야 하지 않겠냐’ 하는 거예요. 


참 웃기는 게 되게 드라마틱해요. 왜냐하면, 저는 12월 말까지 편입 계획이 없었거든요. 졸업하면 적당히 놀다가 죽어야지 생각했는데 1월 초쯤에 갑자기 부모님이 그래도 좀 아깝지 않냐는 얘기를 하니까 갑자기 뭐랄까 느낌이 온 거예요. 될 것 같은 느낌이요. 근데 한 달밖에 남지 않아서 학원에 다닐 수는 없는 상태였어요. 



시간이 촉박하셨겠네요.


네, 그래서 편입 경험이 있는 가정교사를 추천받아서 배웠는데, 제 실력은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은데 정보가 너무 없다고 편입 카페부터 일단 가입을 시키더라고요. 편입시험이 12월 중순에 고려대가 첫 스타트를 끊거든요. 그리고 1월 말까지 줄줄이 있는데 저는 이미 1월 초에 준비를 시작하니 1월 말에 시험 보는 대학밖에 볼 수가 없었어요. 너무 촉박하고 여유가 없었죠. 


그래서 남들은 편입시험의 특성상 무제한으로 원서를 쓸 수 있고 열 군데 넘게 쓰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기회가 제한되었어요. 그래서 세 군데만 썼어요. 홍익대, 국민대, 가톨릭대, 이렇게 썼는데 막상 시험 보고 나니까 크게 기대는 안 했어요. 결과는 홍익대는 아웃되고 가톨릭대랑 국민대는 예비번호 4번이 나왔어요. 가톨릭대는 예비번호 3번에서 끊어졌다고 발표가 났고 간발에 차로 놓치고 나니 화가 머리끝까지 났어요. 


그리고 그다음 날에 국민대에서 합격했다고 등록을 하겠느냐고 전화가 와서 정말 감사하다고 하면서 등록했어요. 막차 탄 거더라고요. 그렇게 극적으로 합격을 했어요. 정말 과정이 극적이었어요.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굉장히 긴장되셨을 것 같아요.


긴장될 정도가 아니고 뭐랄까 인생에서 예상치 못한 기회가 오는데 여기서 못 잡으면서 나는 내가 주어진 만큼의 평균도 못 한 인생을 살 거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붙어야 했어요. 



네. 그러셨군요. 


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인간관계가 험난했어요. 그 이야기를 하려니 마음이 불편해지네요. 

이건 나중에 얘기하는 거로 할게요. 





/



 감당하기 힘들었어요. 이미 번아웃이 올라올 때로 올라온 상태에서…….




네, 그런데 조금 신기하기도 한 것 같아요. 원래 계획이 없었다가 부모님의 권유로 편입을 준비하셨다고 했는데 결과를 기다리는 마음은 굉장히 간절하셨다고 하셨거든요. 짧은 기간 안에 어떻게 목표 의식이 그렇게 강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을지 궁금해요.


그게요, 어떤 영감이 왔어요. 



아까 필(feel)이라고 얘기하셨던 그런 건가요?


그 기회는 꼭 잡아야 할 것 같았어요. 

기회가 왔고 잡아야 하고 여기서 못 잡으면 완전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어떤 느낌이 와서 편입을 준비한 거죠.



그러면 부모님께서 시기가 적절할 때 그런 권유를 하셨네요. 어떻게 보면 부모님들이 영감을 주신 거잖아요. 


별로 부모님께 고마운 마음은 없어요. 제가 잘한 거죠. 제가 잘한 거예요.



그래도 그런 권유를 누군가 해 주지 않았다고 하면 또 거기까지 가기 어렵지 않았을까요?


그런 면은 있죠. 



부모님하고는 어떠셨어요?


긴 이야기지만 간단히 이야기하면, 어머니하고는 아주 사이가 좋고, 

아버지하고는 아주 사이가 나빴다가 최근에 어느 정도 회복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혹시 부모님과 같이 사세요? 




아버지와 회복하는 중이라고 하시니까 좋은 소식이네요.


여전히 고비가 많고 잘 될지는 모르겠어요. 



그래도 조금 여유 있게 조금 템포를 낮춰서, 너무 빠르지 않게 하시면서, 조금 조금씩 가보시면 어떨까요? 

아주 조금이라도 변화는 변화니까요. 


네, 막상 졸업하고 나니까 한 달 벼락치기로 해도 붙었는데 제대로 1년을 잡고 하면 또 붙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학에 다시 들어가고 싶으셨어요?


네, 더 좋은 대학교로. 편입시험을 한 번 더 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학사 편입은 일반 편입보다 훨씬 경쟁률이 낮고 경쟁률 면에서도 유리하니까요. 일단 졸업하면 당장 직장을 구한다는 게 너무 부담스럽기도 하니까 학업을 좀 더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네네.


너무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편입 학원에서 학생들하고의 트러블로 학원을 여러 번 옮기고 나중에 두세 달은 공부에 손을 놓기도 했어요. 결국, 한양대에 붙었는데 졸업을 못 했어요. 그것도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제일 큰 이유는 제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어요. 같은 과에서 같은 과로 편입하는 거랑 완전히 다른 과로 편입하는 거하고는 적응의 레벨이 하늘과 땅 차이라는 거에요. 


일반 편입할 때는 같은 영문과에서 영문과로 가니 학점 인정도 잘 되고 공부한 걸 계속하는 거였는데 학사 편입할 때는 전혀 다른 과로 편입을 했더니 어렵더라고요. 남들이 4년 동안 공부하는 걸 나는 2년 동안 압축해서 해야 하는 거예요. 또 이 과의 특성상 단체 프로젝트가 많은데 적응을 못 해서 한양대는 졸업을 못 했죠.



혹시 무슨 과를 가셨어요?


신문방송학과요. 제가 지금 그 학생증을 갖고 있어요. (보여주며)



아, 언론 정보대학 신문 방송학과 학생이셨네요. 학생증을 아직도 가지고 다니시네요?


아니, 가지고 다니려고 가지고 다닌 게 아니라 어떻게 하다 보니까 가방에 들어가 있었어요. 



학생증을 보니 어떠세요? 졸업을 못 해서 아쉬움이 크실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학교 이름이라는 게 있고 그걸 보고 들어가는 건데 졸업을 못 했으니까 아쉽죠.



제 앞에 계신 세계님과 다른 분 같아요.


이때는 지금보다 훨씬 말랐죠. 



이 당시에도 위장장애가 있으셨어요?


이때는 괜찮았어요. 벌써 11년 전 모습이어서 훨씬 어려 보이네요.



신문방송이나 언론정보학과가 프로젝트 그런 과제 같은 게 많더라고요.


특성상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그런 거에 소질이 없어요. 



그래도 그 전과 전혀 다른 학과를 선택하시는 새로운 도전이었는데요. 


감당하기 힘들었어요. 이미 번아웃이 올라올 때로 올라온 상태에서…….



그러면 아예 1학기 마치고 휴학을 하신 건가요?


네, 휴학 만료로 제적되었어요. 



부모님들도 기대가 많으셨을 것 같아요. 


제가 이미 할 만큼 했고 좀 많이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고 지쳐 있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아주 큰 기대는 안 했어요. 

끝마치지 못했다는 거에 대해 가끔 후회가 있는데 그렇게 후회가 크지는 않아요.


우연히 가방에서 발견한 대학교 학생증, 끝마치지 못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




그걸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냥 속으로 삭이는 것 같아요. 




대학 생활까지 이렇게 쭉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쭉 말씀해 주셨는데, 

그냥 이렇게 다시 한번 힘든 기억이지만 다시 돌이켜서 이렇게 쭉 얘기하시다 보니까 어떠세요?


그때 기억이 다시 새록새록 나니까요. 그래도 의외로 얘기하기 힘들지는 않았고요. 



다행이네요. 


제가 지금 말한 내용은 제 삶에서 거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요. 공개하지 않았던 얘기들이 많이 있어요. 



네, 지나온 시간을 뭔가 한 단어 또는 좀 짧게 요약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정말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고 생각을 하게 되네요.


아까 말씀하신 우여곡절이군요. 


우여곡절이 너무 많았다는 생각입니다. 

우여곡절을 겪은 걸 다 생각하면 막 감정이 압도되는 것 같아요. 



지금도 좀 그러세요? 감정적으로 많이 막 올라오세요? 


말했던 것보다는 앞으로 말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면 감정이 올라오네요. 



옛 기억들 때문에 감정들이 올라올 때 감정을 조절하는 방법이 있으신가요?


그게 있었으면 더 평화롭게 살았겠지요. 

그걸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냥 속으로 삭이는 것 같아요.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세계님이 조금이라도 편해지셨으면 좋겠어요.


네, 털어놓으니까 후련한 건 있어요.



다행이네요.

앞으로의 인터뷰도 무척 기대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2편에 이어서)








interviewer_써니 | 이 시대의 고립과 은둔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사람 

약 15년 동안 사회복지사로 아동, 청소년, 청년들, 그리고 가족들을 만나왔습니다. 자립의 문턱앞에서 머뭇거리거나 행여 문턱을 넘었더라도 쉽게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섞이기 힘들어하며 고립과 은둔의 세계로 들어가는 여러 청년들을 보며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대의 고립과 은둔, 외로움에 관해서 함께 들여다보고 함께 고민하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인터뷰와 두 번째 책 준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sunnyokay7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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