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을 때까지
평범한 삶을 꿈꾸는 렌의 이야기
안녕하세요. 본인 소개 부탁드려요.
95년생 은둔 15년차의 렌입니다.
렌이라는 닉네임은 어떤 의미로 짓게 되었을까요?
10년 전부터 써온 넷상 가명 같은거에요. 성도 정해놨습니다. 모 게임과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이름을 애너그램(특정한 단어나 문장을 재배열해 다른 문장이나 단어로 읽히게끔 하는, 일종의 언어유희 퍼즐)해서 지었습니다.
이번엔 존재 소개를 부탁드려요. 존재 소개란 직업 학력 등의 사회적인 정보 외에 정말로 나라는 사람에 대한 존재 그 자체를 소개하는 방식이랍니다.
학교 및 가정에서의 폭력으로 일찌감치 자퇴 후 조부모님 댁에서 갇혀서 지내고 있는, 대인기피와 애정결핍이 심하고 인정욕이 강한 히키코모리입니다.
부끄러운 방관자가 되기보다는 함께 따돌림 당하는 피해자가 될래
은둔 15년차에 일찌감치 자퇴했었다니, 중학교부터 다니지 않았던 건가요?
중학교 1학년 때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학교 폭력은 초등학교 시절부터도 있었지만 중학생 때 좀 더 심화되었거든요. 정확히 말해서 저를 대상으로 했던 것들 보다는 제 친구들을 대상으로 했던 폭력들에 대해 트라우마가 더 심한 편입니다.
친구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들이라. 어떤 의미일지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한데요.
반마다 자폐증이 있다거나 하는 특수학생들이 있었는데, 집단 괴롭힘이 심했습니다.
같은 중학교에 배정받지 않았다고 다같이 만세를 부르는 일도 있었고, 제 친구의 이름이 처음 보는 아이들 사이에서 욕을 대신하는 말로 돌려 쓰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당한 폭력들은 거의 잊어가는 편이지만 친구들이 당했던 것들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네요.
저도 학교 다닐 적에 반에서 따돌림을 받던 아이들에게 늘 제 손을 내미는 편이었는데 보통 아이들에게 같이 안 좋은 취급을 받게 되는 안타까운 현실이 있잖아요. 렌씨도 그랬던걸까요?
그다지 깊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은 내용이지만, 저도 같은 피해자가 되어버린 것에 대해 전혀 후회는 없어요. 방관자로 남는 것보다 부끄러운게 없다고 생각해서요.
가족에게 나는 그저 화풀이 대상
후회와 부끄러움 없는 선택이 제일 중요한 거니까요. 잘하셨다고 칭찬해주고 싶네요.
이야기 주제를 바꾸어서, 존재 소개 부분에서 조부모님 댁에 '갇혀'있었다고 했는데, 타의적으로 은둔해야 했던 건가요?
공부도 놓았었고, 아는 친구도 없으니 밖에도 안 나가는 은둔이 시작되면서 저 때문에 집안 모두가 무기력해진다고 부모가 집에서 쫓아냈었어요.
당장 갈 곳이 없으니 조부모님 댁에 머무르게 되었지만 시골 마을이었기에 나가서 할 일이나 갈 곳은 더욱이 없었습니다. 동네 망신이 될까 해서 아예 방에서 숨어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조부모님은 부모님에 비해서 안식처와 도피처가 되어 주셨던 걸까요?
친부모와 조부모님의 각자 역할과 렌 씨가 가지는 생각이 궁금해요.
아버지가 저를 많이 학대 하셨었고 가족들은 전부 아버지 편이었습니다. 그게 전부네요.
가족 모두가 방관자였고 저를 방임했던 편입니다.
조부모님 또한 아빠 편이었다는 뜻일까요?
가족'들'이라함이 형제자매라던가 친척들도 있었다는 의미일까요.
가족 친척 모두를 포괄하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성인이 된 후 부모를 고소했는데, 이후로는 때리지 않게 되었지만 ‘아, 이 사람들은 부모로서 보다는 사회적으로 명예가 실추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었네요.
가족들은 왜 그래야 했던 걸까요? 그 일들이 무언가에 대한 체벌이자 훈육이었던 걸까요?
그저 화풀이 대상에 불과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무언가에 대한 체벌이나 훈육이라서 때린다고 달라지는 것들이 있었다면 진작 달라졌을 거예요. 어린 시절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잘 했던 우등생이었지만, 그때에도 상당한 체벌과 폭행을 당했으니까요.
가정이 도무지 가정의 역할을 하지 못했었네요.
어릴 때부터 살아오면서 안식처가 되어주었던 어른이나 존재는 없었던걸까요?
뭐랄까, 가정의 역할과 존재를 대신 해주었던.
도무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생긴 꿈이 하나 있기도 해요. 저는 저 같은 아이들이 다시는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걸 위해서 나중에 꼭 아이들을 지키는 기관을 만들고 싶어요.
아버지에게 나쁜 일들을 당하던 당시 당장의 심정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냥 죽고 싶었던 것 같아요. 매일 밤마다 다음날 눈 뜨지 않게 해달라고 빌기도 하구요.당시 내가 왜 맞는지에 대해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고,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그렇습니다.
제 삶엔 자신이 힘들 때 남을 괴롭혀서 화를 푸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내 스스로 묵혀두고 한없이 쌓아두기만 했어요. 저는 절대로 다른 사람이 다치거나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런 집에서 도망치기위해 집을 나간다거나 하는 가출 같은 걸 시도 해본 적이 있을까요?
가출시도는 많았지만 갈 곳이 없어서 하루이상을 넘기긴 힘들었습니다. 도무지 보호받을 곳이 없었어요. 가정에서 괴롭힘 받고 있는데 돌아갈 곳이 가정 뿐이었으니까요.
접근금지명령 같은게 의미가 없더라구요. 가출했던 어린 저는 아파트 옥상 같은, 어쩌면 사소할 수도 있는 곳조차도 은신처로써 도망갈 수가 없었어서 절망하곤 했었습니다.
억누르는 나날들
은둔 생활 기간 중 외출은 어느 정도 빈도였고 어떤 이유로 어딜 갔었을까요?
한 달에 두 번, 병원을 다녔던 게 거의 전부입니다.
은둔 생활 중 경제 활동을 해봤던 적이 있었을까요?
20살이 되었을 때 아르바이트를 한 차례 했었지만 한 달 만에 금방 관두었었습니다.
조직 내 수직관계 적응이랑, 타인과 하는 소통이 너무 힘들었어요.
은둔생활 중 가장 외로웠던 때, 내지 시기 또 상황. 그리고 그 감정의 극복 과정과 방법이 있으실까요?
아직 제대로 극복은 못한 것 같아요.
스무살 전후로 온라인으로 알던 여자아이와 랜선으로 연애를 했었어요. 이후 도중에 미국으로 유학가게 되면서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습니다. 아직까지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는 마음이지만 그 아이가 사라지고 나서가 굉장히 힘들었었어요.
저는 술 담배도 하지 않고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도무지 잘 몰라서 늘 억누르면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렌이 작곡하거나 연주한 작품이 업로드 된 유튜브 채널 사진, 피아노 치는 렌
사전 인터뷰에서 나아지기 위해 병원도 다니고 약도 먹고 하고 계시다고 하셨어요. 언제부터 였을까요?
약은 현재 9년 정도 째 먹고 있고 병원은 14년 전 자퇴하고나서 부터 계속 다녔습니다.
병원 외에도 상담사들에게 상담도 자주 받았었는데, 제가 느낀 건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결국 달라지는게 없다는 무기력감이었어요. 희망고문 당하는 기분이었달까요.
현 상태의 본인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뭘까요?
환경 변화와, 저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어요.
환경 변화는 대표적으로는 자립이겠죠. 다행히도 나중에 자립과 학비를 도와주시겠다는 지인분이 계시긴 해요.
나의 의미를 찾게 해준 음악을 포기하다
요즘의 하루 일과 및 일상은 어떤가요?
당장 요즘은 계속 공부하느라 바쁘고, 취미로 남게된 음악 연주와 작곡을 하곤 합니다. 우울함에 가만히 있을 때도 있고, 외로움에 공황이 오기도 합니다. 친구가 없는게 요즘 더욱이 괴롭더라구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은 마음일까요?. 대인 기피를 겪고 있다고 하기도 하셨었는데요.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늘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다녔지만 지금은 그냥 자신있게 다닐 수 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게 있는 죄인도 아니고 떳떳히 다닐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나서는요.
사람들 사이에 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아요. 대인기피 때문에 사람이 밀집된 광장은 아직도 가지 못하거든요. 다만 사람들 사이에서 침착함은 유지할 수 있는 편이기는 합니다.
사전 인터뷰에서 일상 겸 취미로 음악 작곡과 연주를 하고 있다고 하셨었어요. 이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은둔 시작 이후 오랜 기간 게임만 하며 시간을 허비하면서 지내고 있었는데 자퇴하고 나서 여러가지 시도해보고자 했던 것들이 있긴 했어요.
그 중 하나로 작곡에 흥미가 있었지만 컴퓨터와 관련 소프트웨어들이 없어 시도를 못하고 있다가 19살이 되어서야 두 가지를 모두 얻게 되었고, 3개월 동안 피아노 삼중주 두 곡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들어본 피아노 삼중주는 베토벤의 대공 트리오가 유일했고 음악적 지식은 어린 시절 3년간 배웠던 게 전부였거니와 피아노가 조부모님 댁에는 없어서 거의 감으로 작곡했었습니다. 이후 피아노 소나타도 몇 곡을 더 적게 되었는데 친척분의 연줄을 통해서 이것들이 어디론가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작곡한 것들을 들어주신 모 대학의 교수님과 오케스트라 지휘자님께서 대학 특별전형 입학 기회를 한번 씩 제안해주셨지만 두 번 다 거절했었습니다.
그냥 포기하기엔 아쉬운 굉장히 좋은 기회들이었을텐데요. 어떤 이유로 거절하셨던 걸까요?
거절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어요.
일단 학교 자체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했습니다. 학교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또 하나는, 학교의 커리큘럼에 저를 맞추다 보면 제가 제 스스로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지고 그들의 방식에 맞는 흔한 사람이 되어버릴 것 같았어요. 마치 제 자신을 잃어버릴 듯 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벌써 몇 년 전의 이야기일텐데요, 현재 작곡과 연주는 직업으로서 나아가려는게 아니라 그저 취미의 영역이라고 하셨어요.
네. 음악 쪽 진로 생각은 현재 없습니다.
예전엔 진로로 가지고자 하셨었을까요? 꿈을 접었던 계기와 이유가 뭘까요?
당시엔 계속 음악을 하고 싶긴 했지만, 그 쪽에서 일하는 분들과 메일 등을 주고 받으며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 보니 아무래도 이런 길은 학벌과 인맥이 중요한 편이었어요. 그런게 결여된 제가 만만하고 여유롭게 먹고 살 수 있는 진로로 생각되지 않았었어서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수년을 음악에 시간을 허비한 이후 올해 들어서 지금은 운전면허를 따고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개발자가 되려고 준비 중이에요. 먹고 살긴 해야 하니까요.

렌이 요즘 만들고 있었던 채팅 봇 코딩 사진
음악 관련 진로를 놓고 어쩌면 조금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을 진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요. 음악은 '자퇴 후 해본 여러 가지 시도'중 하나일 뿐일까요? 특별한 의미와 역할이 있는 존재였을까요?
음악은 제 존재 의미를 찾게 해주었고 더불어 자존감도 드높여주었지만, 지금 이제는 현실을 지내야 하니까요.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있어야 살아갈 수 있을테니. 그걸 위해서 누군가가 날 필요로 할 수 있도록 제 자신을 성장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해 나갈 거예요.
현재 살아가는 이유를 물으면 뭐라고 답해주실까요?
제 삶은 자퇴했을때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살아있으니까요. 지금 삶은 덤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할 일이 남아있다는 뜻이겠거니 합니다. 해서 앞에서 말했듯, 외면 받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갈 거예요. '제 2의 저' 같은 아이가 나타나지 않도록.
과거의 자신에게 돌아간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저는 제 선택에 후회하지 않고, 후회할 선택은 애초에 하지 않는 편이에요.
지금 자신처럼 은둔하고 있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있으실까요?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 경이 했던 말이 있습니다.
'포기한 채 잠드느니 기어서라도 끝까지 움직여라'. 라고 전해주고 싶어요.
(끝)
interviewer_연희 | 인생의 절반이상을 온라인에서 보낸 인터넷 망령. 나이같은건 먹지 않습니다.
과거부터 이어져온 히키코모리로서 자신의 일상에는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고있습니다. 온라인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얘기나누며 지내온 덕에 은둔 생활 중인 친구들 사이에서 발이 넓다는 이유로 졸지에 인터뷰어로 일하게 되어버렸습니다.
당신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줄 수는 없겠지만 공감과 이해가 필요할 때만큼은 자신있게 보듬어 줄 수 있을거라나요. 저를 대신해 인터뷰어에 지원하고 싶으신 분들 어서 지원해주세요. 늘 놀면서 지내고 싶은 히키코모리입니다.(seruna9@naver.com)
* 은둔청년 릴레이 인터뷰는 매주 금요일에 업로드 됩니다.
* 인터뷰를 받고 싶은 분의 신청도 받습니다. 또는 은둔청년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있으면 보내주세요. (tintin@theseeds.asia)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을 때까지
평범한 삶을 꿈꾸는 렌의 이야기
안녕하세요. 본인 소개 부탁드려요.
95년생 은둔 15년차의 렌입니다.
렌이라는 닉네임은 어떤 의미로 짓게 되었을까요?
10년 전부터 써온 넷상 가명 같은거에요. 성도 정해놨습니다. 모 게임과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이름을 애너그램(특정한 단어나 문장을 재배열해 다른 문장이나 단어로 읽히게끔 하는, 일종의 언어유희 퍼즐)해서 지었습니다.
이번엔 존재 소개를 부탁드려요. 존재 소개란 직업 학력 등의 사회적인 정보 외에 정말로 나라는 사람에 대한 존재 그 자체를 소개하는 방식이랍니다.
학교 및 가정에서의 폭력으로 일찌감치 자퇴 후 조부모님 댁에서 갇혀서 지내고 있는, 대인기피와 애정결핍이 심하고 인정욕이 강한 히키코모리입니다.
부끄러운 방관자가 되기보다는 함께 따돌림 당하는 피해자가 될래
은둔 15년차에 일찌감치 자퇴했었다니, 중학교부터 다니지 않았던 건가요?
중학교 1학년 때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학교 폭력은 초등학교 시절부터도 있었지만 중학생 때 좀 더 심화되었거든요. 정확히 말해서 저를 대상으로 했던 것들 보다는 제 친구들을 대상으로 했던 폭력들에 대해 트라우마가 더 심한 편입니다.
친구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들이라. 어떤 의미일지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한데요.
반마다 자폐증이 있다거나 하는 특수학생들이 있었는데, 집단 괴롭힘이 심했습니다.
같은 중학교에 배정받지 않았다고 다같이 만세를 부르는 일도 있었고, 제 친구의 이름이 처음 보는 아이들 사이에서 욕을 대신하는 말로 돌려 쓰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당한 폭력들은 거의 잊어가는 편이지만 친구들이 당했던 것들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네요.
저도 학교 다닐 적에 반에서 따돌림을 받던 아이들에게 늘 제 손을 내미는 편이었는데 보통 아이들에게 같이 안 좋은 취급을 받게 되는 안타까운 현실이 있잖아요. 렌씨도 그랬던걸까요?
그다지 깊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은 내용이지만, 저도 같은 피해자가 되어버린 것에 대해 전혀 후회는 없어요. 방관자로 남는 것보다 부끄러운게 없다고 생각해서요.
가족에게 나는 그저 화풀이 대상
후회와 부끄러움 없는 선택이 제일 중요한 거니까요. 잘하셨다고 칭찬해주고 싶네요.
이야기 주제를 바꾸어서, 존재 소개 부분에서 조부모님 댁에 '갇혀'있었다고 했는데, 타의적으로 은둔해야 했던 건가요?
공부도 놓았었고, 아는 친구도 없으니 밖에도 안 나가는 은둔이 시작되면서 저 때문에 집안 모두가 무기력해진다고 부모가 집에서 쫓아냈었어요.
당장 갈 곳이 없으니 조부모님 댁에 머무르게 되었지만 시골 마을이었기에 나가서 할 일이나 갈 곳은 더욱이 없었습니다. 동네 망신이 될까 해서 아예 방에서 숨어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조부모님은 부모님에 비해서 안식처와 도피처가 되어 주셨던 걸까요?
친부모와 조부모님의 각자 역할과 렌 씨가 가지는 생각이 궁금해요.
아버지가 저를 많이 학대 하셨었고 가족들은 전부 아버지 편이었습니다. 그게 전부네요.
가족 모두가 방관자였고 저를 방임했던 편입니다.
조부모님 또한 아빠 편이었다는 뜻일까요?
가족'들'이라함이 형제자매라던가 친척들도 있었다는 의미일까요.
가족 친척 모두를 포괄하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성인이 된 후 부모를 고소했는데, 이후로는 때리지 않게 되었지만 ‘아, 이 사람들은 부모로서 보다는 사회적으로 명예가 실추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었네요.
가족들은 왜 그래야 했던 걸까요? 그 일들이 무언가에 대한 체벌이자 훈육이었던 걸까요?
그저 화풀이 대상에 불과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무언가에 대한 체벌이나 훈육이라서 때린다고 달라지는 것들이 있었다면 진작 달라졌을 거예요. 어린 시절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잘 했던 우등생이었지만, 그때에도 상당한 체벌과 폭행을 당했으니까요.
가정이 도무지 가정의 역할을 하지 못했었네요.
어릴 때부터 살아오면서 안식처가 되어주었던 어른이나 존재는 없었던걸까요?
뭐랄까, 가정의 역할과 존재를 대신 해주었던.
도무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생긴 꿈이 하나 있기도 해요. 저는 저 같은 아이들이 다시는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걸 위해서 나중에 꼭 아이들을 지키는 기관을 만들고 싶어요.
아버지에게 나쁜 일들을 당하던 당시 당장의 심정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냥 죽고 싶었던 것 같아요. 매일 밤마다 다음날 눈 뜨지 않게 해달라고 빌기도 하구요.당시 내가 왜 맞는지에 대해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고,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그렇습니다.
제 삶엔 자신이 힘들 때 남을 괴롭혀서 화를 푸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내 스스로 묵혀두고 한없이 쌓아두기만 했어요. 저는 절대로 다른 사람이 다치거나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런 집에서 도망치기위해 집을 나간다거나 하는 가출 같은 걸 시도 해본 적이 있을까요?
가출시도는 많았지만 갈 곳이 없어서 하루이상을 넘기긴 힘들었습니다. 도무지 보호받을 곳이 없었어요. 가정에서 괴롭힘 받고 있는데 돌아갈 곳이 가정 뿐이었으니까요.
접근금지명령 같은게 의미가 없더라구요. 가출했던 어린 저는 아파트 옥상 같은, 어쩌면 사소할 수도 있는 곳조차도 은신처로써 도망갈 수가 없었어서 절망하곤 했었습니다.
억누르는 나날들
은둔 생활 기간 중 외출은 어느 정도 빈도였고 어떤 이유로 어딜 갔었을까요?
한 달에 두 번, 병원을 다녔던 게 거의 전부입니다.
은둔 생활 중 경제 활동을 해봤던 적이 있었을까요?
20살이 되었을 때 아르바이트를 한 차례 했었지만 한 달 만에 금방 관두었었습니다.
조직 내 수직관계 적응이랑, 타인과 하는 소통이 너무 힘들었어요.
은둔생활 중 가장 외로웠던 때, 내지 시기 또 상황. 그리고 그 감정의 극복 과정과 방법이 있으실까요?
아직 제대로 극복은 못한 것 같아요.
스무살 전후로 온라인으로 알던 여자아이와 랜선으로 연애를 했었어요. 이후 도중에 미국으로 유학가게 되면서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습니다. 아직까지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는 마음이지만 그 아이가 사라지고 나서가 굉장히 힘들었었어요.
저는 술 담배도 하지 않고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도무지 잘 몰라서 늘 억누르면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렌이 작곡하거나 연주한 작품이 업로드 된 유튜브 채널 사진, 피아노 치는 렌
사전 인터뷰에서 나아지기 위해 병원도 다니고 약도 먹고 하고 계시다고 하셨어요. 언제부터 였을까요?
약은 현재 9년 정도 째 먹고 있고 병원은 14년 전 자퇴하고나서 부터 계속 다녔습니다.
병원 외에도 상담사들에게 상담도 자주 받았었는데, 제가 느낀 건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결국 달라지는게 없다는 무기력감이었어요. 희망고문 당하는 기분이었달까요.
현 상태의 본인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뭘까요?
환경 변화와, 저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어요.
환경 변화는 대표적으로는 자립이겠죠. 다행히도 나중에 자립과 학비를 도와주시겠다는 지인분이 계시긴 해요.
나의 의미를 찾게 해준 음악을 포기하다
요즘의 하루 일과 및 일상은 어떤가요?
당장 요즘은 계속 공부하느라 바쁘고, 취미로 남게된 음악 연주와 작곡을 하곤 합니다. 우울함에 가만히 있을 때도 있고, 외로움에 공황이 오기도 합니다. 친구가 없는게 요즘 더욱이 괴롭더라구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은 마음일까요?. 대인 기피를 겪고 있다고 하기도 하셨었는데요.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늘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다녔지만 지금은 그냥 자신있게 다닐 수 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게 있는 죄인도 아니고 떳떳히 다닐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나서는요.
사람들 사이에 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아요. 대인기피 때문에 사람이 밀집된 광장은 아직도 가지 못하거든요. 다만 사람들 사이에서 침착함은 유지할 수 있는 편이기는 합니다.
사전 인터뷰에서 일상 겸 취미로 음악 작곡과 연주를 하고 있다고 하셨었어요. 이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은둔 시작 이후 오랜 기간 게임만 하며 시간을 허비하면서 지내고 있었는데 자퇴하고 나서 여러가지 시도해보고자 했던 것들이 있긴 했어요.
그 중 하나로 작곡에 흥미가 있었지만 컴퓨터와 관련 소프트웨어들이 없어 시도를 못하고 있다가 19살이 되어서야 두 가지를 모두 얻게 되었고, 3개월 동안 피아노 삼중주 두 곡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들어본 피아노 삼중주는 베토벤의 대공 트리오가 유일했고 음악적 지식은 어린 시절 3년간 배웠던 게 전부였거니와 피아노가 조부모님 댁에는 없어서 거의 감으로 작곡했었습니다. 이후 피아노 소나타도 몇 곡을 더 적게 되었는데 친척분의 연줄을 통해서 이것들이 어디론가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작곡한 것들을 들어주신 모 대학의 교수님과 오케스트라 지휘자님께서 대학 특별전형 입학 기회를 한번 씩 제안해주셨지만 두 번 다 거절했었습니다.
그냥 포기하기엔 아쉬운 굉장히 좋은 기회들이었을텐데요. 어떤 이유로 거절하셨던 걸까요?
거절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어요.
일단 학교 자체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했습니다. 학교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또 하나는, 학교의 커리큘럼에 저를 맞추다 보면 제가 제 스스로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지고 그들의 방식에 맞는 흔한 사람이 되어버릴 것 같았어요. 마치 제 자신을 잃어버릴 듯 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벌써 몇 년 전의 이야기일텐데요, 현재 작곡과 연주는 직업으로서 나아가려는게 아니라 그저 취미의 영역이라고 하셨어요.
네. 음악 쪽 진로 생각은 현재 없습니다.
예전엔 진로로 가지고자 하셨었을까요? 꿈을 접었던 계기와 이유가 뭘까요?
당시엔 계속 음악을 하고 싶긴 했지만, 그 쪽에서 일하는 분들과 메일 등을 주고 받으며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 보니 아무래도 이런 길은 학벌과 인맥이 중요한 편이었어요. 그런게 결여된 제가 만만하고 여유롭게 먹고 살 수 있는 진로로 생각되지 않았었어서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수년을 음악에 시간을 허비한 이후 올해 들어서 지금은 운전면허를 따고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개발자가 되려고 준비 중이에요. 먹고 살긴 해야 하니까요.
렌이 요즘 만들고 있었던 채팅 봇 코딩 사진
음악 관련 진로를 놓고 어쩌면 조금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을 진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요. 음악은 '자퇴 후 해본 여러 가지 시도'중 하나일 뿐일까요? 특별한 의미와 역할이 있는 존재였을까요?
음악은 제 존재 의미를 찾게 해주었고 더불어 자존감도 드높여주었지만, 지금 이제는 현실을 지내야 하니까요.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있어야 살아갈 수 있을테니. 그걸 위해서 누군가가 날 필요로 할 수 있도록 제 자신을 성장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해 나갈 거예요.
현재 살아가는 이유를 물으면 뭐라고 답해주실까요?
제 삶은 자퇴했을때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살아있으니까요. 지금 삶은 덤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할 일이 남아있다는 뜻이겠거니 합니다. 해서 앞에서 말했듯, 외면 받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갈 거예요. '제 2의 저' 같은 아이가 나타나지 않도록.
과거의 자신에게 돌아간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저는 제 선택에 후회하지 않고, 후회할 선택은 애초에 하지 않는 편이에요.
지금 자신처럼 은둔하고 있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있으실까요?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 경이 했던 말이 있습니다.
'포기한 채 잠드느니 기어서라도 끝까지 움직여라'. 라고 전해주고 싶어요.
(끝)
interviewer_연희 | 인생의 절반이상을 온라인에서 보낸 인터넷 망령. 나이같은건 먹지 않습니다.
과거부터 이어져온 히키코모리로서 자신의 일상에는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고있습니다. 온라인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얘기나누며 지내온 덕에 은둔 생활 중인 친구들 사이에서 발이 넓다는 이유로 졸지에 인터뷰어로 일하게 되어버렸습니다.
당신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줄 수는 없겠지만 공감과 이해가 필요할 때만큼은 자신있게 보듬어 줄 수 있을거라나요. 저를 대신해 인터뷰어에 지원하고 싶으신 분들 어서 지원해주세요. 늘 놀면서 지내고 싶은 히키코모리입니다.(seruna9@naver.com)
* 은둔청년 릴레이 인터뷰는 매주 금요일에 업로드 됩니다.
* 인터뷰를 받고 싶은 분의 신청도 받습니다. 또는 은둔청년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있으면 보내주세요. (tintin@theseeds.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