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을
은둔형외톨이들에게
6년간 은둔했었던 모모의 이야기 (2)
이번에는 외로움에 포커스를 맞춰서 얘기를 해볼 건데 은둔을 하면서 외로웠던 적이 있나요? 있다면 언제였을까요?
요즘은 그렇지 않은데 저도 굉장히 외로움을 많이 타던 사람이었어요. 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주변에 사람들이 계속 있었기 때문에 혼자 있는 상황 자체가 굉장히 낯설었거든요. 그래서 K2에 오기 바로 전년도, 24살 전까지는 계속 외로워했었던 것 같아요. 이런 얘기를 이제 나눌 사람도 없고 저를 이해해 주는 사람도 없고, 너무 외로워서 사람을 만나려는 시도를 많이 했었어요. 온라인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사람들이랑 실제로 만나보려는 시도를 해봤었죠.
그러면 그 외로웠던 이유에는 뭐가 있었다고 생각하세요?
어, 질문이 조금 어렵네요. 음... (모모 씨는 여기서 생각에 조금 잠긴 듯했다.) 그때 제가 외로워하고 사람을 찾았던 건 주로 스스로 이런 상황에 놓여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던 거 같아요.
사람들과 만나면서 '나는 사람들과 만날 수 있어'라는 만족감을 얻었던 것 같고, 반대로 사람과 만나지 않으면 '나는 역시 사람을 만날 수 없을 정도로 인생이 망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서 사람과의 만남을 갈구했던 것 같아요.
그렇군요. 뭔가 뭔가 공감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러면 모모 씨가 가장 외로웠을 때 모모 씨를 그 외로움 속에서 견디게 해준 것들이 있었나요? 있다면 어떤 것이었을까요?
사실 저는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걸 계속 찾았던 것 같은데 저는 이제는 더이상 외로움을 잘 느끼지 않게 됐잖아요. 저는 이게 체념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더이상 외로움을 채우려고 하지 말고 그냥 이 받아들여야겠다 하는.
사실 지금은 사람을 굳이 찾지 않지만 그게 외로움이 해소됐기 때문인 것 같지는 않거든요.
결국 외로움을 견디게 해줬던 게 있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럼 반대로 그런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고 어떤 일들을 했을까요?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었을 때, 굉장히 공허했죠. 그랬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조금 돌아보기도 하고 정말 '내가 살아있는 게 맞나?'라는 생각도 했었어요. 사람이 그리워 오프라인 모임을 무작정 나간 적도 있고요. 저 같은 경우 트위터를 했는데, 트위터를 시작했다가 끊었다가 또 외로워지면 트위터를 다시 시작하고 이런 식으로 계속 대화할 상대를 찾았죠.
나는 히키코모리!
은둔을 하면서 내가 소위 말하는 히키코모리라는 걸 언제 알게 되었나요?
제가 21살 때쯤 히키코모리인 걸 인정하고 치료를 받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던 거 같아요.
그러면 이제는 알잖아요. 세상에 히키코모리나 은둔형외톨이같이 나 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가 있고 나와 같은 경험이 경험을 한 사람이 이 세상이 많이 존재한다는 걸요. 그걸 처음 알았을 때 모모 씨는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냥 뭔가 놀랍기도 하고 되게 감격스럽기도 하고 그러면서 마음이 좀 심란하기도 했었던 것 같아요. 저도 은둔을 했지만 사실 은둔을 하게 된 계기가 좋은 과거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힘든 과거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게 저를 굉장히 심란하게 만들었죠.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은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나라고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도 좀 했었던 것 같아요.
이런 생각을 했던 순간이 몇 살 때쯤이었죠?
24살쯤, 처음 은둔고수(은둔경험자가 현 은둔 청년을 돕는 피어서포트(Peer Support·동료협력) 프로그램) 상담을 받고 은둔에 대해서 막 알게 된 그 시점이었어요.
은둔을 하게 되면서 얻었던 신체적 정신적 질환이나 증상 같은 게 있을까요? 신체적 증상이나 피해망상 같은 건 본격적으로 은둔에 들어가기 전이었잖아요.
일단 걷는 게 굉장히 어렵고요. 말을 너무 안 하고 입을 다물고 있으니까 말도 더듬었었고, 목소리 자체도 잘 안 나왔어요. 그리고 눈이 정말 많이 나빠졌어요. 원래 시력이 나쁘지 않았는데 안경까지 쓰게 됐죠.
정신적으로는 불면이 있었어요. 제가 귀신이나 어두운 거 이런 것들을 굉장히 무서워하는데, 당시에는 그 정도가 정말 심했거든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불이 꺼져 있으면 혼자서 망상이 심해지는 거예요. 이게 망상이 심해지면 이걸 실제로 믿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스스로 부정해도 머릿속으로 계속 이게 진짜일 거라는 생각이 있어서, 눈을 감으면 눈앞이 캄캄해지잖아요. 그래서 눈을 못 감았어요. 그런 식으로 잠을 못 잔 적도 굉장히 많아요.
은둔고수와의 만남
그렇군요. 이제는 저희가 은둔에서 나온 얘기를 해볼 건데, 그런 힘든 은둔 경험 속에서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가 굉장히 궁금한 부분이거든요.
일단 정말로 은둔고수의 힘이 굉장히 컸죠. 저와 비슷한 사람에게 은둔을 공감 받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도 저에게 굉장히 컸지만 그 은둔고수를 하면서 제가 짧게나마 밖으로 나갔잖아요.
은둔고수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준 점도 굉장히 컸고, 제가 이전에 상담사 분을 잘못 만나서 상처를 심하게 받아가지고 이제 더 이상 병원도 상담도 못 다니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거든요. 그래서 은둔고수를 보고 전문 상담사가 아니라 저희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보고 정말 마지막으로 한 번 가볼까 하고 간 거였는데 저한테 굉장히 잘됐잖아요.
저는 이제 상담도 못 믿겠다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그냥 일부 선생님들이 그랬던 거니까 그런 상담이나 정신과 다니는 걸 포기할 필요는 없겠다. 싶었던 게 제가 아직 치료를 잘 받고 있는 이유죠.
은둔고수 상담을 받은 뒤 상태가 호전되어 취미가 되었던 등산
쉐어하우스 룸메이트들과 함께 떠났던 여행에서 찍힌 사진. ‘꺄악!’ 카메라를 향해 소리치는 듯하다.
모모 씨는 이제 은둔에서 나왔잖아요. 은둔에서 나와서 경제 활동도 해본 적이 있으신 걸로 아는데 은둔했던 때를 돌이켜 생각하면 지금은 좀 어떤 마음이 드세요?
지금도 종종 생각하는 건데, 아직도 사실 실감이 잘 안 나요.
스스로 은둔에서 나왔다는 게, 일어나면 저는 쉐어하우스 안에 있고 제 눈앞에는 저와 같이 사는 룸메이트가 보이고, 또 본가에 오면 관계가 회복된 가족들이 있으니까 일어나 있을 때는 좀 인식을 하는데, 자고 일어났을 때 가끔씩 이게 전부 다 꿈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요.
이제는 괜찮아졌는데도 은둔했을 때의 기억이 너무 강하게 남아서 종종 아직 거기에 머물러 있는데, 사실은 이것도 다 내가 만들어낸 환상 아닐까, 아직도 그러고 있는 거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한 번씩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요즘은 좀 어떻게 살고 계세요. 은둔에서 나온 후의 근황이 궁금해요.
사실 개인적인 고민은 있긴 한데요. 그래도 은둔할 때에 비하면 굉장히 많이 좋아졌죠.
제일 좋은 건 가족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 것, 그리고 이제는 신뢰할 수 있는 친구들도 생겼고, 관계에 대한 고민도 많이 줄었어요.
전에는 사람을 대할 때 생각이 굉장히 많았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있으니까 관계에 대해서 고민을 크게 안 하게 됐고, 사실 지금은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처럼 일을 못하고, 아예 못 나가고 이런 게 아니니까 좀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해요.
모모씨가 일경험프로그램을 통해 '시시밥X슬로카페 달팽이'에서 일을 했을 당시의 모습. 그는 이 카페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한 기회’라고 말했다.
기쁘네요.
네. 그게 행복하기도 하고요.
그러면 이건 진짜 마지막 질문인데요.
모모 씨는 지금 좀 희망이라는 걸 좀 찾으셨나요?
저는 찾은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당신에게 희망이란 어떤 건가요?
희망은 사실 내일 아침에 일어날 이유인 것 같아요.
전에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서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래도 내일은 어떤 생활을 할 수 있을지 좀 더 기대를 해보고,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가 생긴 것 같아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혹은 소중한 사람들이 찍어준 ‘나’의 사진. 모모는 아직 자신의 사진을 찍는 게 어색하다고 말했다.
(끝)
interviewer_하나 | 방 밖으로 나온 지 몇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다시 은둔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
중학교를 중퇴하고 그대로 11년간 은둔했습니다. 우울증과 대인기피를 치료하기 위해 입원한 병원에서 1년 동안 두 번의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연한 기회로 K2인터내셔널코리아에서 운영한 '은둔고수' 1기와 2기를 수료했습니다. 은둔형외톨이 지원 영역에 발을 담그기 시작해 현재는 저술 활동과 더불어 관련 연구나 언론매체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hanahana122123@gmail.com)
* 은둔청년 릴레이 인터뷰는 매주 금요일에 업로드 됩니다.
* 인터뷰이 신청도 받습니다. 또는 은둔청년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있으면 보내주세요. (tintin@theseeds.asia)
어쩌면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을
은둔형외톨이들에게
6년간 은둔했었던 모모의 이야기 (2)
이번에는 외로움에 포커스를 맞춰서 얘기를 해볼 건데 은둔을 하면서 외로웠던 적이 있나요? 있다면 언제였을까요?
요즘은 그렇지 않은데 저도 굉장히 외로움을 많이 타던 사람이었어요. 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주변에 사람들이 계속 있었기 때문에 혼자 있는 상황 자체가 굉장히 낯설었거든요. 그래서 K2에 오기 바로 전년도, 24살 전까지는 계속 외로워했었던 것 같아요. 이런 얘기를 이제 나눌 사람도 없고 저를 이해해 주는 사람도 없고, 너무 외로워서 사람을 만나려는 시도를 많이 했었어요. 온라인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사람들이랑 실제로 만나보려는 시도를 해봤었죠.
그러면 그 외로웠던 이유에는 뭐가 있었다고 생각하세요?
어, 질문이 조금 어렵네요. 음... (모모 씨는 여기서 생각에 조금 잠긴 듯했다.) 그때 제가 외로워하고 사람을 찾았던 건 주로 스스로 이런 상황에 놓여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던 거 같아요.
사람들과 만나면서 '나는 사람들과 만날 수 있어'라는 만족감을 얻었던 것 같고, 반대로 사람과 만나지 않으면 '나는 역시 사람을 만날 수 없을 정도로 인생이 망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서 사람과의 만남을 갈구했던 것 같아요.
그렇군요. 뭔가 뭔가 공감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러면 모모 씨가 가장 외로웠을 때 모모 씨를 그 외로움 속에서 견디게 해준 것들이 있었나요? 있다면 어떤 것이었을까요?
사실 저는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걸 계속 찾았던 것 같은데 저는 이제는 더이상 외로움을 잘 느끼지 않게 됐잖아요. 저는 이게 체념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더이상 외로움을 채우려고 하지 말고 그냥 이 받아들여야겠다 하는.
사실 지금은 사람을 굳이 찾지 않지만 그게 외로움이 해소됐기 때문인 것 같지는 않거든요.
결국 외로움을 견디게 해줬던 게 있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럼 반대로 그런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고 어떤 일들을 했을까요?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었을 때, 굉장히 공허했죠. 그랬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조금 돌아보기도 하고 정말 '내가 살아있는 게 맞나?'라는 생각도 했었어요. 사람이 그리워 오프라인 모임을 무작정 나간 적도 있고요. 저 같은 경우 트위터를 했는데, 트위터를 시작했다가 끊었다가 또 외로워지면 트위터를 다시 시작하고 이런 식으로 계속 대화할 상대를 찾았죠.
나는 히키코모리!
은둔을 하면서 내가 소위 말하는 히키코모리라는 걸 언제 알게 되었나요?
제가 21살 때쯤 히키코모리인 걸 인정하고 치료를 받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던 거 같아요.
그러면 이제는 알잖아요. 세상에 히키코모리나 은둔형외톨이같이 나 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가 있고 나와 같은 경험이 경험을 한 사람이 이 세상이 많이 존재한다는 걸요. 그걸 처음 알았을 때 모모 씨는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냥 뭔가 놀랍기도 하고 되게 감격스럽기도 하고 그러면서 마음이 좀 심란하기도 했었던 것 같아요. 저도 은둔을 했지만 사실 은둔을 하게 된 계기가 좋은 과거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힘든 과거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게 저를 굉장히 심란하게 만들었죠.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은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나라고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도 좀 했었던 것 같아요.
이런 생각을 했던 순간이 몇 살 때쯤이었죠?
24살쯤, 처음 은둔고수(은둔경험자가 현 은둔 청년을 돕는 피어서포트(Peer Support·동료협력) 프로그램) 상담을 받고 은둔에 대해서 막 알게 된 그 시점이었어요.
은둔을 하게 되면서 얻었던 신체적 정신적 질환이나 증상 같은 게 있을까요? 신체적 증상이나 피해망상 같은 건 본격적으로 은둔에 들어가기 전이었잖아요.
일단 걷는 게 굉장히 어렵고요. 말을 너무 안 하고 입을 다물고 있으니까 말도 더듬었었고, 목소리 자체도 잘 안 나왔어요. 그리고 눈이 정말 많이 나빠졌어요. 원래 시력이 나쁘지 않았는데 안경까지 쓰게 됐죠.
정신적으로는 불면이 있었어요. 제가 귀신이나 어두운 거 이런 것들을 굉장히 무서워하는데, 당시에는 그 정도가 정말 심했거든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불이 꺼져 있으면 혼자서 망상이 심해지는 거예요. 이게 망상이 심해지면 이걸 실제로 믿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스스로 부정해도 머릿속으로 계속 이게 진짜일 거라는 생각이 있어서, 눈을 감으면 눈앞이 캄캄해지잖아요. 그래서 눈을 못 감았어요. 그런 식으로 잠을 못 잔 적도 굉장히 많아요.
은둔고수와의 만남
그렇군요. 이제는 저희가 은둔에서 나온 얘기를 해볼 건데, 그런 힘든 은둔 경험 속에서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가 굉장히 궁금한 부분이거든요.
일단 정말로 은둔고수의 힘이 굉장히 컸죠. 저와 비슷한 사람에게 은둔을 공감 받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도 저에게 굉장히 컸지만 그 은둔고수를 하면서 제가 짧게나마 밖으로 나갔잖아요.
은둔고수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준 점도 굉장히 컸고, 제가 이전에 상담사 분을 잘못 만나서 상처를 심하게 받아가지고 이제 더 이상 병원도 상담도 못 다니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거든요. 그래서 은둔고수를 보고 전문 상담사가 아니라 저희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보고 정말 마지막으로 한 번 가볼까 하고 간 거였는데 저한테 굉장히 잘됐잖아요.
저는 이제 상담도 못 믿겠다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그냥 일부 선생님들이 그랬던 거니까 그런 상담이나 정신과 다니는 걸 포기할 필요는 없겠다. 싶었던 게 제가 아직 치료를 잘 받고 있는 이유죠.
은둔고수 상담을 받은 뒤 상태가 호전되어 취미가 되었던 등산
쉐어하우스 룸메이트들과 함께 떠났던 여행에서 찍힌 사진. ‘꺄악!’ 카메라를 향해 소리치는 듯하다.
모모 씨는 이제 은둔에서 나왔잖아요. 은둔에서 나와서 경제 활동도 해본 적이 있으신 걸로 아는데 은둔했던 때를 돌이켜 생각하면 지금은 좀 어떤 마음이 드세요?
지금도 종종 생각하는 건데, 아직도 사실 실감이 잘 안 나요.
스스로 은둔에서 나왔다는 게, 일어나면 저는 쉐어하우스 안에 있고 제 눈앞에는 저와 같이 사는 룸메이트가 보이고, 또 본가에 오면 관계가 회복된 가족들이 있으니까 일어나 있을 때는 좀 인식을 하는데, 자고 일어났을 때 가끔씩 이게 전부 다 꿈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요.
이제는 괜찮아졌는데도 은둔했을 때의 기억이 너무 강하게 남아서 종종 아직 거기에 머물러 있는데, 사실은 이것도 다 내가 만들어낸 환상 아닐까, 아직도 그러고 있는 거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한 번씩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요즘은 좀 어떻게 살고 계세요. 은둔에서 나온 후의 근황이 궁금해요.
사실 개인적인 고민은 있긴 한데요. 그래도 은둔할 때에 비하면 굉장히 많이 좋아졌죠.
제일 좋은 건 가족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 것, 그리고 이제는 신뢰할 수 있는 친구들도 생겼고, 관계에 대한 고민도 많이 줄었어요.
전에는 사람을 대할 때 생각이 굉장히 많았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있으니까 관계에 대해서 고민을 크게 안 하게 됐고, 사실 지금은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처럼 일을 못하고, 아예 못 나가고 이런 게 아니니까 좀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해요.
모모씨가 일경험프로그램을 통해 '시시밥X슬로카페 달팽이'에서 일을 했을 당시의 모습. 그는 이 카페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한 기회’라고 말했다.
기쁘네요.
네. 그게 행복하기도 하고요.
그러면 이건 진짜 마지막 질문인데요.
모모 씨는 지금 좀 희망이라는 걸 좀 찾으셨나요?
저는 찾은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당신에게 희망이란 어떤 건가요?
희망은 사실 내일 아침에 일어날 이유인 것 같아요.
전에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서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래도 내일은 어떤 생활을 할 수 있을지 좀 더 기대를 해보고,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가 생긴 것 같아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혹은 소중한 사람들이 찍어준 ‘나’의 사진. 모모는 아직 자신의 사진을 찍는 게 어색하다고 말했다.
(끝)
interviewer_하나 | 방 밖으로 나온 지 몇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다시 은둔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
중학교를 중퇴하고 그대로 11년간 은둔했습니다. 우울증과 대인기피를 치료하기 위해 입원한 병원에서 1년 동안 두 번의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연한 기회로 K2인터내셔널코리아에서 운영한 '은둔고수' 1기와 2기를 수료했습니다. 은둔형외톨이 지원 영역에 발을 담그기 시작해 현재는 저술 활동과 더불어 관련 연구나 언론매체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hanahana122123@gmail.com)
* 은둔청년 릴레이 인터뷰는 매주 금요일에 업로드 됩니다.
* 인터뷰이 신청도 받습니다. 또는 은둔청년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있으면 보내주세요. (tintin@theseeds.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