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있을, 어디에나 있는.
세상에 목소리를 내고 싶은 김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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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두두서포터즈 1기 뚝깨비입니다. 피어서포터즈로서, 김밐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네,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본격적으로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앞으로 뭐라고 불러드리면 될까요?
저는 이제 두두 커뮤니티 쪽에서는 김밐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고 있고요. 편하게 김밐님이나 아니면 밐님 이렇게 호칭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름 끝에 ‘ㅋ’을 넣으셨는데 특별히 다른 의미가 있을까요?
닉네임은 본명의 성 ‘김’과 세례명 ‘미카엘’을 포함한 단어구요. 영어로 표기하면 KimMic으로 ‘기믹’이라는 말장난과, 목소리를 스스로 내고 싶다는 의미로 말할 때 쓰는 ‘마이크’를 줄인 의미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물론 진지하게 큰 의미의 무언가를 생각하고 지었다기보다, 가볍게 지은 거라 깊은 뜻이 있는 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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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일상
그러면 김밐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김밐님, 요즘에는 어떻게 지내세요?
글쎄요. 인생의 큰 변화도 1년 안에 있었고, 그 안에서 또 큰 변화가 최근에 있었는데요. 제가 약식 인터뷰에도 말씀드렸지만 한 달 보름 전쯤부터 편의점 야간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원래 일용직 같은 건 다니고 있었지만, 월급제로 큰 금액을 받으면서 풀타임으로 일하는 건 거의 처음이거든요. 야간근무라는 것도 처음이고, 이 일을 잘할 수 있을까, 잘 버틸 수 있을까 생각을 많이 했는데, 어느 정도 제가 이제 은둔 시절을 극복하고 나오면서 쌓인 경험들로 그것들이 예전보다 수월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스스로에게도 굉장히 많이 놀랐고 현재는 점포 내에서 가장 신뢰받는 근무자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김밐님이 일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전경. 그날그날 오는 재고를 정리하는 것으로 일을 시작한다고 한다. 커피 한 잔 하면서 에너지를 얻는다고 한다.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삶을 잘 개척하시는 분들 보면 든든하고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보통은 낮에 일하고 밤에 쉬고 싶어 하잖아요. 야간근무를 선택하신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야간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사실 제 점포의 점장님과 저는 굉장히 오래 알고 지낸 사이에요. 제가 초, 중학생 때부터 알던 분인데, 제가 그분께 안 좋은 모습을 평소에 좀 많이 보여드렸어요. 침울해 있고, 이런 모습을 많이 보여드렸기 때문에 거기서 일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 제가 좀 극복을 하는 모습을 보셨나 봐요. 사람 분위기도 좀 달라져 있다, 사람이 180도 달라졌다. 이런 말씀을 자주 해주셨어요. 그러다가 저한테 지금 평일 야간 근무자가 시간이 많이 비워서 좀 대타가 필요하니 혹시 해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이제 은둔 극복을 시작하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한계 중 하나가 돈벌이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일 경험도 부족하고 경제적 독립을 계속 유지할 계기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그 제안을 받은 순간 이거는 잡아야겠다고 생각을 했죠.
원래는 은둔 극복을 시작하였을 때는 역전된 밤낮을 다시 돌려놓는 데 집중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런데 제안받은 일자리가 야간이다 보니 이대로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일터가 사는 곳과 바로 근처기도 하고, 야간근무를 일단 도전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여건도 좋고, 금액적인 면에도 보수도 괜찮은 편이고 야간 수당이 따로 붙지 않지만, 주휴수당 포함해서 꽤 짭짤하게 나오는 편이고요.
김밐님을 믿어주는 상사와 함께 일하니까 마음이 놓이겠네요.
그런 면도 많이 이점이 됐죠. 네 맞습니다.
그 외에 이제 일과는 따로 있을까요? 게임이나 영화를 좋아하신다고 하는데 혹시 알피지 이런 거 좋아하세요?
일단 게임 장르는 다양한 경험을 추구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영화도, 게임도 장르는 안 가리려고 노력은 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제가 좀 오랜 은둔 생활을 겪었기 때문에 협동하는 게임이나, 다른 사람들과 직접 실시간으로 경쟁하는 게임을 잘하지 못해요. 그조차도 많이 익혀야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그나마 하는 게 원신쯤이긴 한데 이것은 혼자 하는 경향이 짙은 게임입니다.
은둔 생활을 하면서 스팀 게임 컬렉션 1000개를 돌파했다고 한다. 영화도 다수 섭렵하였다. 영화건, 게임이건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을 추구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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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들의 도움과 수많은 도전으로 이 자리까지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은 15번째 릴레이 인터뷰이고, 두두서포터즈가 직접 인터뷰하는 것은 처음인데 어떤 계기로 신청을, 그리고 언제쯤 신청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일단 말씀을 드리기 전, 빌드업이 좀 필요한데요. 제가 극복을 시도할 초창기에 두더지땅굴같은 커뮤니티가 전문적으로 개설이 안 돼 있을 때였어요. 히키코모리 문제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저와 연결되는 것 같아서 이걸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관련 활동가 분들과 단체에 연락을 많이 넣었었어요. 그러다 씨즈 관련 분들과도 연결이 될 수 있었고, 당시에는 도전하던 와중에 두려워져서 포기했었거든요. 그런 과정에서 씨즈의 ‘미노루’님, 그리고 다른 단체들이지만, ‘안무서운회사’의 ‘유승규’님과 여러 활동가, 은둔고수 분들, 부모님 분들이나 ‘리커버리센터’ 같은 곳들의 분들에게 많은 도움과 지지를 받았죠. 저는 공동생활이나 SBS 곰손카페까지 제안을 받았지만, 현실적인 제약과 두려움 때문에 도망쳤어요.
너무 아쉽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뭔가 스스로 극복하려고 계속 시도를 했어요. 그 과정에서 ‘미노루’님의 지속적인 교류로 ‘두두’의 개설과 함께 합류하게 되었고, 커뮤니티와 모임터 단톡방에서 은둔고수로 활동하시면서 제가 영감을 많이 받았던, 릴레이 인터뷰 2번째로 해주셨던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은둔고수 1기 음원 프로젝트[혹시 괜찮다면 물어봐도 될까요] - 은둔청년 당사자들이 작사, 작곡, 노래하였다.
네 한번 저도 자조 모임을 갔었는데 뵌 적이 있습니다.
현재 자조모임 단톡방의 관리자이시기도 하고, 예전에 제가 알기로는 지금 릴레이인터뷰도 하셨었고 2차 인터뷰 당사자이기도 하다고 알고 있어요. 제가 부모 자조 모임에 나갔을 때, 그분이 운둔 고수의 멘토로 그때 현장에 잠깐 나오셨었거든요. 그때 한번 안면을 튼 적이 있어요. 하나님 역시 오랜 시간 동안 운둔을 하셨고 힘든 시절이 있었다고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극복을 하시면서 본인이 받으신 영감을 노래로 작곡, 작사를 하시고 세상에 내보내는 활동이 정말 인상적으로 느꼈거든요.
그런 일련의 활동들을 보면서 동경심을 품고 항상 극복하려고 노력했는데, 전에 도망쳤을 때 그런 분들의 도움에 내가 기대를 배반했다는 자책감이 들었어요. 언젠가는 좀 더 떳떳한 모습을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다시 인사드리고, 도움을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거든요.
그래서 두두로 들어왔는데 두두에서 활동하다 보니까 하나님을 만난 거예요, 다시. 반갑게 이야기를 하다가 릴레이인터뷰에 한번 지원해보지 않으시겠냐고 권유를 받았어요. 저도 원래 릴레이인터뷰를 종종 보면서 하고 싶어 했지만, 항상 용기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그 제의를 통해서 조금 더 동기부여를 받았던 것 같고, 이제는 조금이라도 이런 콘텐츠에 참여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직 겁도 많고 직접 제 신분을 드러내는 활동은 어렵겠지만, 단계적으로 밟아나가는 단계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굉장히 설레는 마음으로 이곳에 지금 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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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은둔청년이 될 수 있다.
그래도 이것저것 많이 알아보시고 도전도 하신 게 정말 대단하십니다. 지금은 거의 은둔 극복에 가까운 단계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되기까지 정말 많은 힘듦과 많은 노력, 그리고 또 주변분들의 많은 도움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짐작이 들어요.
김밐님, 본인이 생각하시는 은둔기간은 얼마나 될까요.
기간은 답하기 조금 애매해요. 일단 일반적으로 그 시기를 지나오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느 시간을 보냈는지, 시간적 감각이 굉장히 희미해져요. 약물치료의 영향도 있어 명확하게 딱 기간을 정하기는 어렵고. 그래도 대강 잡자면 13~16년도 정도부터 낌새가 보이기 시작했고, 가장 심한 기간을 모아봤을 때 한 5년 정도가 될 거예요.
아시겠지만 지금 은둔과 고립의 개념도 애매하잖아요. 명확하게 정립이 안 되고, 현장에서도 이런 부분이 조금 명확하게 명시가 좀 어려운 걸로 알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예시를 좀 들면 정말로 방 안에서만 나오기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그리고 방 안에서 집 안으로 범위가 넓어진 경우도 있고, 집 밖 외출은 잠깐 가능하다 편의점 정도 가능하다 아니면 장을 볼 수 있다 정도. 더 좋은 경우에는 자주 모임을 나갈 수도 있고 아니면 일을 시작하거나 아니면 여행을 갔다. 올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게 심해졌다가 다시 좋아졌다가 다시 심해지는 그런 루틴을 겪을 수도 있는 거고.
그래서 이거를 명확하게 설명하기가 저도 어렵다고는 보는데 그나마 규정을 해보자면 5년, 그리고 총 힘들어했던 기간을 따지면 지금까지 한 8~9년 정도 이상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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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 학교폭력. 그럼에도 치열하게 살고 버티다 버티다 공황으로 쓰러지다.
은둔청년하면 사회적으로 딱 편견이 있잖아요. 보통 방 안에서만 틀어박혀 있는 경우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제가 만나본 분들은 열심히 나오려고도 하시고, 또 자기 관리도 열심히 하시고, 나름대로 치열하게 사시는 분들도 많은데 사회적 재정립과 새로운 인식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은둔은 어쩌다가 하게 되셨어요? 불편하신 부분은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불편한 부분도 있겠지만 다른 분이 엮여 있는 얘기는 조금씩 피해가면서, 순화해 가면서 말씀을 드릴게요. 일단 어렸을 때 얘기부터 말씀드릴게요. 저희 집안은 지금 생각했을 때도 분위기가 양육방식이나 분위기가 건강하지 못한 집이었어요. 저희 부모님의 사이가 굉장히 좋지 않으셨고 집안 집기 같은 것들이 좀 많이 부서질 수도 있을 정도로 싸움도 많았고, 아버지의 주폭이라든가 그런 것들도 좀 많았어요. 그래서 경찰이 와서 문제 해결을 시도했던 적도 있거든요.
그래서 접근금지 명령이라든가 이런 것도 있었는데 어떻게 그 시기를 흘러오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제 좀 많은 상처를 입은 분이 또.. 저희 누나 한 분이 계세요.
누나가 저하고 좀 나이 차이가 많이 나거든요. 거의 한 10살 전후로. 제가 어렸을 때 제 누나는 동경의 대상이었거든요. 아무래도 이제 부모님의 그런 환경 속에서 어린 나이에 주도적인 뭔가 삶을 살지 못했어요. 그리고 사회적으로 뭔가 지켜야 될 룰이나 눈치, 습관 이런 것들을 잘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굉장히 많이 나돌았고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거의 6년 정도 연속으로 당할 정도로 많이 힘들어 했거든요. 그런 상황 속에서 누나가 굉장히 큰 버팀목이었는데 그런 누나도 이제 집안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가출을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굉장히 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고 부모님은 그런 사건 사고들을 어떻게든 정리를 하셔야 되니까 그런 부분에 좀 신경을 쏟으면서 저는 좀 소외된 부분도 있죠. 그리고 누나가 그렇게 버티지 못하고 결국에 나중에는 성인이 돼서 자취를 시작하게 했거든요.
그러면 누나분은 미성년자 때 아예 가출을 하신 거예요?
네 가출을 했었죠. 그래서 자퇴해서 검정고시를 보셨어요. 그래서 그 와중에 저도 굉장히 좀 외로워졌었고 결국 그 폭력적인 가정 환경에 저 혼자 놓이게 됐었거든요. 오히려 또 이제 누나의 선례가 있기 때문에 부모님께서는 저에 대해서 굉장히 더 많은 집착을 보이셨고 누나에게 한 것보다는 굉장히 케어를 많이 해 주시려고 노력하셨어요. 저한테 그 부분은 감사하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제는 그게 이제 너무 큰 집착으로 이어지다 보니까 문제가 되었어요. 누나가 했던 전례를 밟지 않으려 했던 집착이 강하셨는지 매사 모든 면에서 간섭이 들어왔어요.
제가 학교를 다녀오면 아무래도 학생이니까 공부를 해야 하는 건 맞는데 그래도 어느 정도 스트레스를 풀 게임도 하고 그런 환경이 좀 있으면 좋잖아요.
그런데 이제 그것들을 절대 용납을 하지 않으셔서 제가 학교를 다녀오면 컴퓨터 방문이 잠겨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제 딴에는 그거를 어떻게든 열어보겠다고 방문에 톱질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좀 기괴했죠. 행동이 근데 어쨌든 제가 처한 상태도 기괴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그때는 정상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 삶이. 문이 잠겨 있고. 지금은 어쨌든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고, 조금은 괜찮아진 것 같습니다.
은둔의 계기 그거를 말씀드리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어쨌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무래도 그 때도 이제 우울증이라든가 adhd 같은 성향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그거를 케어받지 못하고 저 스스로 계속 자책을 많이 했어요.
부모님 가정 환경이 불우한 것도 내 탓인가, 따돌림을 당한 것도 내 탓인가 하면서 계속 자책을 하다가 고등학교 때 학군을 바꾸면서, 그 전과는 다르게 새로운 시도를 해봐야겠다 싶어서 제 스스로를 점검하고 다른 방식으로도 애들한테 다가갔거든요, 새로 만난 애들한테. 그래서 그 전과는 다르게 친구는 많이 생겼어요. 스스로 자신감도 많이 붙었고 이제 그게 대학 생활까지 꾸준히 이어져가지고 괜찮게 생활을 하는 편이긴 했다가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안 되다보니까..
네 가정 폭력 이런 것들이...
폭력이 나아졌다는 건 정말 기본적인 거고, 가족과 소통방식 자체는 아직도 폭력적이고 제 스스로가 아직 제 주체성을 찾지 못했었기 때문에, 한꺼번에 과거의 트라우마와 엮여가지고 터져버리니까 이제 폭풍이 물 밀듯이 밀려오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누군가 말하기에는 제 대학교 1, 2학년 때가 굉장히 빛났던 사람이었다고 기억을 한 대요. 여러 가지 동아리 활동이라든가, 부회장도 맡아본 적이 있고 대학교 방송국에서 활동을 하면서 대학 축제 이런 것도 같이 기획 행사에 참여해 본 적도 있고, 되게 막 여러 가지 활동을 많이 했거든요. 영화 같은 것도 스태프들이랑, 동료들이랑 촬영도 해보고.
물론 그때도 제 잘못된 습관이나 가치관 때문에 문제 되는 행동을 했었던 것 같긴 해요, 몇 번. 그렇게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다가. 대학교가 그나마 저를 좀 잡아줬던 공간인 것 같은데 2학년이 끝나고 군대를 갈 시기가 되었어요.
예 보통 그때 많이 군대 많이 가죠.
그래서 휴학을 했는데 솔직히 군대를 그렇게 능동적으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저는 아직도 군대 갔다 오는 사람들을 굉장히 존중하고 존경하는데, 제 스스로가 그거를 견딜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당시에 군대를 가고 싶어도 막 갈 수 없는 환경이기도 했거든요. 군 대기자가 그때 굉장히 많았어요. 제 세대의 사람들이 수요보다 인력 공급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입대 원서를 넣어도 그게 계속 미뤄지고 지연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가 현역 입대를 1년을 기다렸는데도 계속 자리가 안 나는 거예요. 그 와중에 이제 아르바이트 같은 것도 하고 그랬었지만.
그 상황이 오랫동안 길어지니까 같이 다니던 친구들은 제대하고, 전 못 들어간 거예요. 그래서 그 친구들하고 만났을 때 군대 얘기가 나오면 저는 낄 자리가 없고. 집에서는 부모님께서 너 그냥 갈 수 있으면 충분히 갈 수 있을 텐데 안 가고 싶어서 발악한다라는 얘기도 하셨고, 그리고 주변에서도 계속 군대 못 가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눈치라든가 압박, 잔소리, 혹은 한심하다는 시선도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실제로 제가 아르바이트를 나가면 너 군대 안 갔다왔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것도 굉장한 스트레스였어요, 개인적으로는. 그래서 적체된 사람들을 현역으로 빼기 힘드니까 사회복무요원으로 4급, 공익이죠. 시쳇말로는 그걸로 돌리는 정책이 펼쳐졌었거든요. 그래서 그걸 통해서 이제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았는데도 그것도 1년 정도 기다렸어요.
그래서 인생이 너무 많은 시간을 기다리면서 소진이 됐고 그러면서 굉장히 중요한 가정사가 한번 터졌거든요. 여러 가지 문제가 엮였지만.. 사채 빚이 좀 엮여 있었다라는것만 말씀을 드릴게요.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면서, 가족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그것도 굉장히 좀 엄청난 부담이었거든요.
제가 성숙했다면 그런 것들을 대처하는 데 그나마 수월했겠지만, 부모님의 통제 습관 때문에 스스로 주도권을 가지지 못하는 삶을 살아서 정상적, 자주적 생활에 필요한 지식이라든가 지혜, 이런 것들이 거의 없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그런 불가항력적인 사건들이 여러 번 터지다 보니까 그나마 견디던 것들이 계속 물밀듯이 수렁으로 계속 빠져들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골든타임이 있었을 수 있지만.
공황 발작으로 구토까지 하고, 몇 번을 쓰러지다보니 공익 근무지 센터장님께서 면제전환을 해주셨어요. 하지만 주변에서는 그렇게 힘들어하는 저를 보면서 나약해 빠졌다고 하고, 특히 부모님께서는 쇼한다라고 말씀을 하시고 그러다 보니까 이해를 못 받는다는 생각이 너무 강해져서 스스로를 가뒀던 것 같아요.
(2편에 이어서)
interviewer_뚝깨비 / 뚝배기 깨는 도깨비, 탈출의 정령
은둔수저를 물었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리더가 되고 싶은 뚝깨비입니다. 고립에서 벗어나 여러 도전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탈출의 전략이 필요하신 분은 연락 주시면 도움 드리겠습니다. ttukkabi@naver.com
* 은둔 청년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있으면 보내주세요. (dudug@theseeds.asia)
어디선가 있을, 어디에나 있는.
세상에 목소리를 내고 싶은 김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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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두두서포터즈 1기 뚝깨비입니다. 피어서포터즈로서, 김밐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네,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본격적으로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앞으로 뭐라고 불러드리면 될까요?
저는 이제 두두 커뮤니티 쪽에서는 김밐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고 있고요. 편하게 김밐님이나 아니면 밐님 이렇게 호칭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름 끝에 ‘ㅋ’을 넣으셨는데 특별히 다른 의미가 있을까요?
닉네임은 본명의 성 ‘김’과 세례명 ‘미카엘’을 포함한 단어구요. 영어로 표기하면 KimMic으로 ‘기믹’이라는 말장난과, 목소리를 스스로 내고 싶다는 의미로 말할 때 쓰는 ‘마이크’를 줄인 의미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물론 진지하게 큰 의미의 무언가를 생각하고 지었다기보다, 가볍게 지은 거라 깊은 뜻이 있는 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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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일상
그러면 김밐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김밐님, 요즘에는 어떻게 지내세요?
글쎄요. 인생의 큰 변화도 1년 안에 있었고, 그 안에서 또 큰 변화가 최근에 있었는데요. 제가 약식 인터뷰에도 말씀드렸지만 한 달 보름 전쯤부터 편의점 야간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원래 일용직 같은 건 다니고 있었지만, 월급제로 큰 금액을 받으면서 풀타임으로 일하는 건 거의 처음이거든요. 야간근무라는 것도 처음이고, 이 일을 잘할 수 있을까, 잘 버틸 수 있을까 생각을 많이 했는데, 어느 정도 제가 이제 은둔 시절을 극복하고 나오면서 쌓인 경험들로 그것들이 예전보다 수월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스스로에게도 굉장히 많이 놀랐고 현재는 점포 내에서 가장 신뢰받는 근무자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김밐님이 일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전경. 그날그날 오는 재고를 정리하는 것으로 일을 시작한다고 한다. 커피 한 잔 하면서 에너지를 얻는다고 한다.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삶을 잘 개척하시는 분들 보면 든든하고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보통은 낮에 일하고 밤에 쉬고 싶어 하잖아요. 야간근무를 선택하신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야간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사실 제 점포의 점장님과 저는 굉장히 오래 알고 지낸 사이에요. 제가 초, 중학생 때부터 알던 분인데, 제가 그분께 안 좋은 모습을 평소에 좀 많이 보여드렸어요. 침울해 있고, 이런 모습을 많이 보여드렸기 때문에 거기서 일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 제가 좀 극복을 하는 모습을 보셨나 봐요. 사람 분위기도 좀 달라져 있다, 사람이 180도 달라졌다. 이런 말씀을 자주 해주셨어요. 그러다가 저한테 지금 평일 야간 근무자가 시간이 많이 비워서 좀 대타가 필요하니 혹시 해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이제 은둔 극복을 시작하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한계 중 하나가 돈벌이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일 경험도 부족하고 경제적 독립을 계속 유지할 계기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그 제안을 받은 순간 이거는 잡아야겠다고 생각을 했죠.
원래는 은둔 극복을 시작하였을 때는 역전된 밤낮을 다시 돌려놓는 데 집중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런데 제안받은 일자리가 야간이다 보니 이대로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일터가 사는 곳과 바로 근처기도 하고, 야간근무를 일단 도전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여건도 좋고, 금액적인 면에도 보수도 괜찮은 편이고 야간 수당이 따로 붙지 않지만, 주휴수당 포함해서 꽤 짭짤하게 나오는 편이고요.
김밐님을 믿어주는 상사와 함께 일하니까 마음이 놓이겠네요.
그런 면도 많이 이점이 됐죠. 네 맞습니다.
그 외에 이제 일과는 따로 있을까요? 게임이나 영화를 좋아하신다고 하는데 혹시 알피지 이런 거 좋아하세요?
일단 게임 장르는 다양한 경험을 추구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영화도, 게임도 장르는 안 가리려고 노력은 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제가 좀 오랜 은둔 생활을 겪었기 때문에 협동하는 게임이나, 다른 사람들과 직접 실시간으로 경쟁하는 게임을 잘하지 못해요. 그조차도 많이 익혀야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그나마 하는 게 원신쯤이긴 한데 이것은 혼자 하는 경향이 짙은 게임입니다.
은둔 생활을 하면서 스팀 게임 컬렉션 1000개를 돌파했다고 한다. 영화도 다수 섭렵하였다. 영화건, 게임이건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을 추구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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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들의 도움과 수많은 도전으로 이 자리까지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은 15번째 릴레이 인터뷰이고, 두두서포터즈가 직접 인터뷰하는 것은 처음인데 어떤 계기로 신청을, 그리고 언제쯤 신청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일단 말씀을 드리기 전, 빌드업이 좀 필요한데요. 제가 극복을 시도할 초창기에 두더지땅굴같은 커뮤니티가 전문적으로 개설이 안 돼 있을 때였어요. 히키코모리 문제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저와 연결되는 것 같아서 이걸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관련 활동가 분들과 단체에 연락을 많이 넣었었어요. 그러다 씨즈 관련 분들과도 연결이 될 수 있었고, 당시에는 도전하던 와중에 두려워져서 포기했었거든요. 그런 과정에서 씨즈의 ‘미노루’님, 그리고 다른 단체들이지만, ‘안무서운회사’의 ‘유승규’님과 여러 활동가, 은둔고수 분들, 부모님 분들이나 ‘리커버리센터’ 같은 곳들의 분들에게 많은 도움과 지지를 받았죠. 저는 공동생활이나 SBS 곰손카페까지 제안을 받았지만, 현실적인 제약과 두려움 때문에 도망쳤어요.
너무 아쉽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뭔가 스스로 극복하려고 계속 시도를 했어요. 그 과정에서 ‘미노루’님의 지속적인 교류로 ‘두두’의 개설과 함께 합류하게 되었고, 커뮤니티와 모임터 단톡방에서 은둔고수로 활동하시면서 제가 영감을 많이 받았던, 릴레이 인터뷰 2번째로 해주셨던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은둔고수 1기 음원 프로젝트[혹시 괜찮다면 물어봐도 될까요] - 은둔청년 당사자들이 작사, 작곡, 노래하였다.
네 한번 저도 자조 모임을 갔었는데 뵌 적이 있습니다.
현재 자조모임 단톡방의 관리자이시기도 하고, 예전에 제가 알기로는 지금 릴레이인터뷰도 하셨었고 2차 인터뷰 당사자이기도 하다고 알고 있어요. 제가 부모 자조 모임에 나갔을 때, 그분이 운둔 고수의 멘토로 그때 현장에 잠깐 나오셨었거든요. 그때 한번 안면을 튼 적이 있어요. 하나님 역시 오랜 시간 동안 운둔을 하셨고 힘든 시절이 있었다고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극복을 하시면서 본인이 받으신 영감을 노래로 작곡, 작사를 하시고 세상에 내보내는 활동이 정말 인상적으로 느꼈거든요.
그런 일련의 활동들을 보면서 동경심을 품고 항상 극복하려고 노력했는데, 전에 도망쳤을 때 그런 분들의 도움에 내가 기대를 배반했다는 자책감이 들었어요. 언젠가는 좀 더 떳떳한 모습을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다시 인사드리고, 도움을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거든요.
그래서 두두로 들어왔는데 두두에서 활동하다 보니까 하나님을 만난 거예요, 다시. 반갑게 이야기를 하다가 릴레이인터뷰에 한번 지원해보지 않으시겠냐고 권유를 받았어요. 저도 원래 릴레이인터뷰를 종종 보면서 하고 싶어 했지만, 항상 용기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그 제의를 통해서 조금 더 동기부여를 받았던 것 같고, 이제는 조금이라도 이런 콘텐츠에 참여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직 겁도 많고 직접 제 신분을 드러내는 활동은 어렵겠지만, 단계적으로 밟아나가는 단계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굉장히 설레는 마음으로 이곳에 지금 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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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은둔청년이 될 수 있다.
그래도 이것저것 많이 알아보시고 도전도 하신 게 정말 대단하십니다. 지금은 거의 은둔 극복에 가까운 단계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되기까지 정말 많은 힘듦과 많은 노력, 그리고 또 주변분들의 많은 도움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짐작이 들어요.
김밐님, 본인이 생각하시는 은둔기간은 얼마나 될까요.
기간은 답하기 조금 애매해요. 일단 일반적으로 그 시기를 지나오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느 시간을 보냈는지, 시간적 감각이 굉장히 희미해져요. 약물치료의 영향도 있어 명확하게 딱 기간을 정하기는 어렵고. 그래도 대강 잡자면 13~16년도 정도부터 낌새가 보이기 시작했고, 가장 심한 기간을 모아봤을 때 한 5년 정도가 될 거예요.
아시겠지만 지금 은둔과 고립의 개념도 애매하잖아요. 명확하게 정립이 안 되고, 현장에서도 이런 부분이 조금 명확하게 명시가 좀 어려운 걸로 알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예시를 좀 들면 정말로 방 안에서만 나오기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그리고 방 안에서 집 안으로 범위가 넓어진 경우도 있고, 집 밖 외출은 잠깐 가능하다 편의점 정도 가능하다 아니면 장을 볼 수 있다 정도. 더 좋은 경우에는 자주 모임을 나갈 수도 있고 아니면 일을 시작하거나 아니면 여행을 갔다. 올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게 심해졌다가 다시 좋아졌다가 다시 심해지는 그런 루틴을 겪을 수도 있는 거고.
그래서 이거를 명확하게 설명하기가 저도 어렵다고는 보는데 그나마 규정을 해보자면 5년, 그리고 총 힘들어했던 기간을 따지면 지금까지 한 8~9년 정도 이상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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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 학교폭력. 그럼에도 치열하게 살고 버티다 버티다 공황으로 쓰러지다.
은둔청년하면 사회적으로 딱 편견이 있잖아요. 보통 방 안에서만 틀어박혀 있는 경우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제가 만나본 분들은 열심히 나오려고도 하시고, 또 자기 관리도 열심히 하시고, 나름대로 치열하게 사시는 분들도 많은데 사회적 재정립과 새로운 인식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은둔은 어쩌다가 하게 되셨어요? 불편하신 부분은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불편한 부분도 있겠지만 다른 분이 엮여 있는 얘기는 조금씩 피해가면서, 순화해 가면서 말씀을 드릴게요. 일단 어렸을 때 얘기부터 말씀드릴게요. 저희 집안은 지금 생각했을 때도 분위기가 양육방식이나 분위기가 건강하지 못한 집이었어요. 저희 부모님의 사이가 굉장히 좋지 않으셨고 집안 집기 같은 것들이 좀 많이 부서질 수도 있을 정도로 싸움도 많았고, 아버지의 주폭이라든가 그런 것들도 좀 많았어요. 그래서 경찰이 와서 문제 해결을 시도했던 적도 있거든요.
그래서 접근금지 명령이라든가 이런 것도 있었는데 어떻게 그 시기를 흘러오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제 좀 많은 상처를 입은 분이 또.. 저희 누나 한 분이 계세요.
누나가 저하고 좀 나이 차이가 많이 나거든요. 거의 한 10살 전후로. 제가 어렸을 때 제 누나는 동경의 대상이었거든요. 아무래도 이제 부모님의 그런 환경 속에서 어린 나이에 주도적인 뭔가 삶을 살지 못했어요. 그리고 사회적으로 뭔가 지켜야 될 룰이나 눈치, 습관 이런 것들을 잘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굉장히 많이 나돌았고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거의 6년 정도 연속으로 당할 정도로 많이 힘들어 했거든요. 그런 상황 속에서 누나가 굉장히 큰 버팀목이었는데 그런 누나도 이제 집안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가출을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굉장히 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고 부모님은 그런 사건 사고들을 어떻게든 정리를 하셔야 되니까 그런 부분에 좀 신경을 쏟으면서 저는 좀 소외된 부분도 있죠. 그리고 누나가 그렇게 버티지 못하고 결국에 나중에는 성인이 돼서 자취를 시작하게 했거든요.
그러면 누나분은 미성년자 때 아예 가출을 하신 거예요?
네 가출을 했었죠. 그래서 자퇴해서 검정고시를 보셨어요. 그래서 그 와중에 저도 굉장히 좀 외로워졌었고 결국 그 폭력적인 가정 환경에 저 혼자 놓이게 됐었거든요. 오히려 또 이제 누나의 선례가 있기 때문에 부모님께서는 저에 대해서 굉장히 더 많은 집착을 보이셨고 누나에게 한 것보다는 굉장히 케어를 많이 해 주시려고 노력하셨어요. 저한테 그 부분은 감사하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제는 그게 이제 너무 큰 집착으로 이어지다 보니까 문제가 되었어요. 누나가 했던 전례를 밟지 않으려 했던 집착이 강하셨는지 매사 모든 면에서 간섭이 들어왔어요.
제가 학교를 다녀오면 아무래도 학생이니까 공부를 해야 하는 건 맞는데 그래도 어느 정도 스트레스를 풀 게임도 하고 그런 환경이 좀 있으면 좋잖아요.
그런데 이제 그것들을 절대 용납을 하지 않으셔서 제가 학교를 다녀오면 컴퓨터 방문이 잠겨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제 딴에는 그거를 어떻게든 열어보겠다고 방문에 톱질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좀 기괴했죠. 행동이 근데 어쨌든 제가 처한 상태도 기괴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그때는 정상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 삶이. 문이 잠겨 있고. 지금은 어쨌든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고, 조금은 괜찮아진 것 같습니다.
은둔의 계기 그거를 말씀드리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어쨌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무래도 그 때도 이제 우울증이라든가 adhd 같은 성향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그거를 케어받지 못하고 저 스스로 계속 자책을 많이 했어요.
부모님 가정 환경이 불우한 것도 내 탓인가, 따돌림을 당한 것도 내 탓인가 하면서 계속 자책을 하다가 고등학교 때 학군을 바꾸면서, 그 전과는 다르게 새로운 시도를 해봐야겠다 싶어서 제 스스로를 점검하고 다른 방식으로도 애들한테 다가갔거든요, 새로 만난 애들한테. 그래서 그 전과는 다르게 친구는 많이 생겼어요. 스스로 자신감도 많이 붙었고 이제 그게 대학 생활까지 꾸준히 이어져가지고 괜찮게 생활을 하는 편이긴 했다가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안 되다보니까..
네 가정 폭력 이런 것들이...
폭력이 나아졌다는 건 정말 기본적인 거고, 가족과 소통방식 자체는 아직도 폭력적이고 제 스스로가 아직 제 주체성을 찾지 못했었기 때문에, 한꺼번에 과거의 트라우마와 엮여가지고 터져버리니까 이제 폭풍이 물 밀듯이 밀려오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누군가 말하기에는 제 대학교 1, 2학년 때가 굉장히 빛났던 사람이었다고 기억을 한 대요. 여러 가지 동아리 활동이라든가, 부회장도 맡아본 적이 있고 대학교 방송국에서 활동을 하면서 대학 축제 이런 것도 같이 기획 행사에 참여해 본 적도 있고, 되게 막 여러 가지 활동을 많이 했거든요. 영화 같은 것도 스태프들이랑, 동료들이랑 촬영도 해보고.
물론 그때도 제 잘못된 습관이나 가치관 때문에 문제 되는 행동을 했었던 것 같긴 해요, 몇 번. 그렇게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다가. 대학교가 그나마 저를 좀 잡아줬던 공간인 것 같은데 2학년이 끝나고 군대를 갈 시기가 되었어요.
예 보통 그때 많이 군대 많이 가죠.
그래서 휴학을 했는데 솔직히 군대를 그렇게 능동적으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저는 아직도 군대 갔다 오는 사람들을 굉장히 존중하고 존경하는데, 제 스스로가 그거를 견딜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당시에 군대를 가고 싶어도 막 갈 수 없는 환경이기도 했거든요. 군 대기자가 그때 굉장히 많았어요. 제 세대의 사람들이 수요보다 인력 공급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입대 원서를 넣어도 그게 계속 미뤄지고 지연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가 현역 입대를 1년을 기다렸는데도 계속 자리가 안 나는 거예요. 그 와중에 이제 아르바이트 같은 것도 하고 그랬었지만.
그 상황이 오랫동안 길어지니까 같이 다니던 친구들은 제대하고, 전 못 들어간 거예요. 그래서 그 친구들하고 만났을 때 군대 얘기가 나오면 저는 낄 자리가 없고. 집에서는 부모님께서 너 그냥 갈 수 있으면 충분히 갈 수 있을 텐데 안 가고 싶어서 발악한다라는 얘기도 하셨고, 그리고 주변에서도 계속 군대 못 가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눈치라든가 압박, 잔소리, 혹은 한심하다는 시선도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실제로 제가 아르바이트를 나가면 너 군대 안 갔다왔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것도 굉장한 스트레스였어요, 개인적으로는. 그래서 적체된 사람들을 현역으로 빼기 힘드니까 사회복무요원으로 4급, 공익이죠. 시쳇말로는 그걸로 돌리는 정책이 펼쳐졌었거든요. 그래서 그걸 통해서 이제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았는데도 그것도 1년 정도 기다렸어요.
그래서 인생이 너무 많은 시간을 기다리면서 소진이 됐고 그러면서 굉장히 중요한 가정사가 한번 터졌거든요. 여러 가지 문제가 엮였지만.. 사채 빚이 좀 엮여 있었다라는것만 말씀을 드릴게요.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면서, 가족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그것도 굉장히 좀 엄청난 부담이었거든요.
제가 성숙했다면 그런 것들을 대처하는 데 그나마 수월했겠지만, 부모님의 통제 습관 때문에 스스로 주도권을 가지지 못하는 삶을 살아서 정상적, 자주적 생활에 필요한 지식이라든가 지혜, 이런 것들이 거의 없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그런 불가항력적인 사건들이 여러 번 터지다 보니까 그나마 견디던 것들이 계속 물밀듯이 수렁으로 계속 빠져들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골든타임이 있었을 수 있지만.
공황 발작으로 구토까지 하고, 몇 번을 쓰러지다보니 공익 근무지 센터장님께서 면제전환을 해주셨어요. 하지만 주변에서는 그렇게 힘들어하는 저를 보면서 나약해 빠졌다고 하고, 특히 부모님께서는 쇼한다라고 말씀을 하시고 그러다 보니까 이해를 못 받는다는 생각이 너무 강해져서 스스로를 가뒀던 것 같아요.
(2편에 이어서)
interviewer_뚝깨비 / 뚝배기 깨는 도깨비, 탈출의 정령
은둔수저를 물었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리더가 되고 싶은 뚝깨비입니다. 고립에서 벗어나 여러 도전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탈출의 전략이 필요하신 분은 연락 주시면 도움 드리겠습니다. ttukkabi@naver.com
* 은둔 청년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있으면 보내주세요. (dudug@theseeds.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