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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고립청년 릴레이 인터뷰_#16: 쥬리




당신도 노력을 하지 않아도 히키가 될 수 있다

모난 돌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_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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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리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은둔 청년 인터뷰를 진행하게 된 우연이라고 합니다.

인터뷰 시작할까요?


네, 시작하죠.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나이는 26세고요 면허나 자격증은 운전 면허가 유일하고요.

토익이나 토플은 손도 못댔었어요.

즉 스펙이 없고요. 대학도 자퇴했습니다. 

용돈도 부족하겠다, 돈이 필요하지 않을까해서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왔고요.

경력이라기엔 뭐하지만 대인 기피 경력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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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삶의 현재 상태는 지렁이와 같습니다




다음으로, 존재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존재 소개란 나 스스로가 나를 봤을 때 어떤 사람이라고 느껴지는지를 

혹은 어떤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간단히 소개하는 거예요.


안녕하세요. 제 삶의 목표는 길가에 내몰려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아무렇게도 움직이지 않는 돌과 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 삶의 현재 상태는 지렁이와 같습니다.

지렁이들은 비가 올 때 살기 위해 잠시 땅 밖으로 고개를 내밀다

해가 뜨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굴속으로 숨어들어가버리는 습성이 있어요.

저도 돈이 궁할 때면 살기 위해 일을 하고 일이 끝나면 방구석으로 쏙 들어가 버려요.

그와 같은 모습들이 닮아 있다고 생각하기에 제 상태는 지렁이와 같다고 비유했어요.



표현이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먼저 여쭤보고 싶어졌어요.

돌이라는 비유는 흥미로워요. 그런 목표를 잡게 된 사연이 있을까요?


돌이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를 보면 암석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의미가 담겨있어요.

저는 사회라는 암석에서 떨어져 나온 모난 돌 같은 존재가 되고 싶더라고요.

사회에서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나도 사회라는 무거운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돌아와서, 인터뷰에 자원하시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사실은 제가 예전에 보이스피싱을 당한 적이 있어요. 

피해 금액은 약 500만 원이었고요.

그래서 노골적으로 말할게요. 

예, 돈이 좀 궁한 상태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내가 뭔 거창한 일을 할 수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야간 편의점 알바를 하며 여러 부업들을 찾아보고 있었던 도중에 

이 인터뷰는 정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에 덥석 물었죠.



굉장히 분명한 계기네요. 저는 환영합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당신도 노력을 하지 않아도 히키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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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난’이란 의미는 ‘모서리'가 난





앞선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모난‘이라는 표현을 쓰셨잖아요.

그런데 지금까지 들었던 자신의 삶에 대한 쥬리님의 태도는

길고 가는 삶을 지향하는 것으로 느껴지거든요.

’모난‘이라는 표현에 쥬리님이 담은 의미가 궁금해요.


’모난’이란 의미는 ‘모서리'가 난이라는 의미예요. 이 의미는 부정적인 비유를 담게 되어요.

사람들이 종종 하는 말들이 있잖아요. 저 사람 참 모났어. 성격이 모났네.

실제로 그런 표현들을 들어왔었고요.

그런 걸 보면 저는 모난 돌이 아닐까. 이 사회의 배척을 받은 게 아닐까.

이미 그렇게 되어버렸다면, 그래 내가 모난 돌임을 받아들이자.

그리고 모날 거라면 확실하고 뾰족한 모를 내자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사회의 배척을 당한 모난 사람이라니 가슴에 묘한 느낌이 드네요.

본인은 주로 언제, 혹은 어떤 상황에 모난 돌이라는 표현을 듣게 되었나요?


말하자면 긴 이야기지만 이런 기회 아니면 언제 이야기해 보겠어요.

그런 고로 입술을 떼보자면, 중학교 2학년일 때였어요.

좋아하던 누나가 있었는데, 학생들 사이에서 소위 말하는 일진 느낌이 물씬 나는 누나였어요.

그 누나와 저는 같은 학원을 다니는 사이였어요.

제가 중학생일 땐 피부가 깨끗해서 나름 얼굴이 괜찮았거든요.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제 감일뿐이지만 왠지 착각은 아닐 거 같네요.


좋게 봐줘서 고마워요.

아무튼, 그래서 그 누나에게 같은 학원도 다니겠다, 얘기도 좀 나눠봤겠다.

그리고 그 누나에게 “너 좀 귀엽다?”라는 말을 들을 때,

’어? 이 누나도 날 좋아하나..?‘라고 생각해버렸어요.

급기야 저는 머릿속에서 이미 이 누나와의 노후준비 계획까지 완벽하게 세웠죠.



서로의 마음이 통하게 된 상황으로 보이네요.


저도 그리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예, 저질러버렸습니다.

그녀와 같이 다니는 학원에서 그녀를 마주하고. 그녀에게 직접 제 마음을 전했죠.

누나를 정말 좋아한다는 그 마음.

그 누나의 대답은 가관이었어요.

대표적으로는, 너는 그냥 귀여운 동생으로밖에 안 보인다. 남자로 도저히 느껴지지가 않아.

정도가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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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났다고? 오냐, 모가 뭔지 보여주겠다




,,,제 마음이 다 저리네요.

그러면 그때 그분에게 너는 모난 돌과 같다는 이야기도 같이 듣게 됐었나요?


모났다는 표현을 듣게 된 건 다행히도 면전에서는 아니었어요.

음, 다행이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평소처럼 하교를 하던 어느 날,

하굣길 뒷골목에 누나와 그 누나의 친구들 즉 제 선배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요.

4명 정도의 혼성 그룹이 뭉쳐있었죠. 그 누나를 필두로 마구마구 수다를 떨고 있었어요.

그러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어요. 그 누나의 친구가 야 야 저기 모난 뭐 지나간다고 하는 걸 똑똑히 들었어요. 저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도망치듯이 길을 틀었어요.



저 같아도 그런 상황은 다행이 아닐 거 같아요.



맞아요. 거기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겠죠. 저에 대한 소문이 퍼지더라고요.

당연히 걷잡을 수 없었죠.

소문은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가고 뾰족한 나뭇가지들을 끌어안고 함께 굴러가게 되죠.

당연하게도 제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저는 자연스레 반에서 고립당해버리고 말았어요.

학군이 좀 험난해서, 따를 당할 때 같이 놀아주지 않는 은따가 아닌

대놓고 나를 괴롭히는 왕따가 되어버렸어요. 그때부터 제 성격이 꺾이고 대인 기피 경력이 시작돼요.

“모났다고? 오냐, 모가 뭔지 보여주겠다.“ 정도의 삐뚤어진 마음을 가지게 되었네요.



뭐 살다 보면 그런 삐뚤어지게 되는 시간이 있을 수 있죠.

어쩌면 필요악이라고 생각되기도 하고요.

쥬리님의 삐뚤어진 마음이란 어떤 마음이었나요?


이 모가 최고로 날카로웠을 땐 모든 게 잘못됐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다녔어요.

어느 날은 그런 상상도 했었어요. 역사 시간에 한일 문제에 관한 질의응답이 오갔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 전 생각했었죠. 제발 나한테 질문해라 일본이 다시 한국을 점령해버리라고 답해버릴 테다.

이 나라가 나한테 해준 게 뭔데. 불행히도 질문은 오지 않더라고요. 안타까웠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라면 굉장히 어릴 때 일 텐데요, 이후로 학창 시절은 주로 어떻게 지내왔나요?


투명 인간처럼 지냈어요.

이미 삐져나온 돌인데 남들 눈에 안 띄어야 안전하게 보낼 수가 있으니까요.



투명 인간처럼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니 굉장히 공감이 많이 되는데요.

숨죽이고 살던 그 어린 투명 인간을 괜히 건드리는 사건은 없었나요?


건드리는 사람이 있어도 제가 무시하면 그 사람도 곧 흥미를 잃고 저에게 관심을 크게 주진 않았어요.

그렇기에 이렇다 할 사건은 없었습니다.



똑똑하게 잘 회피하며 살아왔군요. 저 역시 아이들을 피해 다니는 모난 투명 인간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단 한 명의 친구가 생겼었어요.

그 친구가 외로운 학창 시절을 지내고 있던 저의 그나마의 버팀목이 되어주었거든요.

쥬리님의 학창 시절에도 그러한 버팀목이 있었을까요?


좋은 경험이네요. 유감스럽게도 저에게는 그런 버팀목이 없었어요.

그나마 밤새 게임을 하기도 했었지만, 그마저도 제 삶에 어떠한 재미나 낙은 아니었어요.

워낙에 할 게 없었기 때문에 시간을 죽이는 짓에 가까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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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꽁꽁 묶인 채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





학교를 다닐 동안의 생활 패턴이 궁금해요.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게임 중독자들과 다를 게 없었을 거예요.

6시에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간단한 저녁, 즉 주로 라면이나 빵 등을 먹어요.

그리고 공허한 집구석에서도 가장 공허한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텅 빈 눈빛으로 게임을 켜곤 했어요.

그렇게 10시간 정도를 무료하게 보냈어요. 그러면 새벽 5시가 되죠.

그렇게 늦잠을 자면 학교에서 잠이 잘 오기 때문에 그나마 학교생활을 버틸 수 있더라고요.

버티는 걸까? 회피에 가깝긴 하겠네요.

그렇게 쪽잠 자고 일어나서 학교에 가서 자버리고 돌아와서 게임하고... 쳇바퀴 같은 삶이었죠.




저도 밤새고 새벽까지 게임하거나 핸드폰 보는 거 참 좋아했었어요.

그럴 때마다 제 부모님이 저에게 따가운 눈초리와 꾸중을 주시더라고요.

쥬리님도 제 사례와 비슷한 경험이 있진 않았었나요?


당연히 있었죠.

늦게까지 게임을 할 때면 새벽이란 시간에도 불구하고 언성이 높아지는 건 예삿일이었고,

컴퓨터를 압수당하기도, 파괴당하기도 했었어요.



,,,굉장히 무서운 부모님이셨군요. 쥬리님의 가정은 주로 어떤 풍경이었나요?


부모님이 과보호가 심해서 주로 외출금지 상태였어요.

집에 안 보인다 싶으면 전화했고요.

주말엔 친구들이랑 노는 것도 막아섰어요.

과보호로 인해서 친구들과의 사이도 소원해지고 친하게 다가왔던 친구들도 연락이 안 되고

집에서는 나를 보호하려는 장벽이 이젠 나를 사회에서 속박하는 사슬이 되어서

제 자유를 억압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제 온몸이 꽁꽁 묶인 채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고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부모님 몰래 나가보기도 했어요.

당시에 저는 서울로 놀러 갔었고, 부모님은 그것을 보고 화가 나있었죠.

납치나 사고를 당하면 어쩌냐느니 길을 잃으면 어쩌냐느니 나쁜 친구면 어떡하냐느니

아무리 생각해도 터무니없을 이유들로 불처럼 화를 내셨고 외출에 대한 규제가 더 심각해졌죠.



참 안타깝네요. 규제는 어떤 형태로 더 심각해졌나요?


그 이후로 제 핸드폰에는 위치 추적기 같은 부가 서비스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부가 서비스는 시간마다 부모님에게 제 위치를 전송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규제는 통금이 11시에서 10시로 앞당겨졌고,

방과 후에는 사진과 함께 바로바로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죠.

그런 식으로 강화된 규제 속에서 만기전역을 앞둔 병장이 다시 이등병이 되는 느낌으로 성인만 되어보자란 심정으로 이를 갈면서 버텼죠. 

성인이 되어서 취직을 하고 자취를 하자고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현재 저는 히키코모리에 능력도 없으니까 자취를 하려면 한참이겠죠.




 쥬리 _이 사진을 보면 왠지' 갈 길이 멀다'는 감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 사진이 생각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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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길이 멀다






길고 긴 속 사정들이네요. 본격적인 은둔 생활이 시작된 건 언제인가요?


본격적이라 하면 아마도 20대 초였을 거예요.

대학교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의 사회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했죠.

그래서 결국 자퇴라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은둔생활이 시작되었죠. 가끔 생활비나 돈이 부족할 때 주로 먹을 게 없을 때 간간이 단기 알바나

혼자서 집에서 할 수 있는 알바들을 했었죠.



대학교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라... 대학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대학교 학과 특성상 조별 과제가 많고 교수님과 합의를 해서 해야하는 과제나 시험들 위주였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낯선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법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됐죠.

대학을 그만두게 되었죠. 학과는 비밀입니다.



쥬리님의 대학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던 상황들 중 가장 기억나는 상황을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4명에서 모여서 교수님과 함께 소통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건데 아무도 팀장을 하려고 하지 않아서 교수님이 픽해 주셨는데 그게 제가 됐습니다. 근데 저는 중학생 때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고 투명인간, 모난돌처럼 살아왔는데 이 조를 잘 이끌 자신이 없었어요.


뿐만 아니라 늘 있는 레퍼토리처럼 조장을 제외한 빌런이 3명 더 있게 된 거죠. 그 3명은 제 말에 대해서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았고 약속을 잡으려 해도 당일에 취소하는 등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교수님 마저 이런 실태에 대한 관심이나 책임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제만 던져주고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라 식이었죠.



이런 대학 생활을 앞으로 7학기나 더 해야한다고 생각하니 등록금을 5백씩이나 내는데 너무 아깝단 생각이 들어 그만두게 되었죠. 안 하느니만 못한 거 같더라고요.



아하, 저 역시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입장으로서 공감이 가네요.

대학교를 자퇴하고 난 뒤의 삶에 대해 질문해 보고 싶어요.

삶의 패턴은 주로 경제활동을 기준으로 구성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므로 경제활동 경험에 관한 질문을 드리려고 해요.

혹시 현재 진행 중이신가요?

혹은 과거에 존재했던 경제활동은 어떤 형태로 존재했었나요?


삶을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먹고 싶은 거 먹고 방에서 안 나가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요.

물론 부모님이 약간의 용돈을 주시긴 하지만 부족하죠.

그래서 돈이 부족해지면 간단한 여러 아르바이트들을 전전하며 지내왔어요.



주로 경제 활동은 재택 아르바이트를 추구하는 편이거나 집 주변에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전부입니다. 코딩 복사 알바 , 문서 작업, 마케팅 알바, 블로그 포스팅 원고 알바 등의 재택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고요. 코로나가 유행했던 시기에는 각 지자체마다 코로나 온도 체크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이 있고요.

그리고 인형탈 알바도 해봤어요. 야간 편의점 알바 등의 단기 알바도 해봤습니다.


현재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네요.



인형탈 알바 꽤 귀엽네요.

아무튼 재택 아르바이트는 주로 타임이 정해져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느꼈는데,

쥬리님의 재택 아르바이트 역시 시간대가 불규칙했었나요?


깨어나서 하면 하고 귀찮으면 다음으로 미룰 때가 많았죠.

자고 일어나서 먹고 게임하다가 재택 아르바이트 하나 하고 다시 먹고 피곤하면 자고

알바 진행하다가 다시 게임하고 자고... 이게 주요 생활 패턴이 되겠네요.




역시 불규칙적이었네요. 재택 아르바이트를 할 동안의 식사는 주로 어떻게 해결했나요?


식사 시간 역시 불규칙적으로 해결했던 거 같아요. 모든 생활패턴이 현재까지도 불규칙적입니다.

몸이 깨어나면 일어나고 배고프면 먹고. 밥은 주로 배달을 시키거나 집에 있는 밥을 먹었어요.

제일 만만한 게 라면이었죠.



그렇다면 재택 아르바이트를 할 동안의 수면 패턴은 어땠나요?


수면패턴도 역시 불규칙적이라서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날이면 날마다 변했고 어떻게 변하는지조차 정해진 규칙이 없었어요.



혹시 재택 아르바이트와 단기 아르바이트를 동시에 했던 적이 있었나요?


동시에는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정도로 성실하진 않아서 말이죠



앞에서 언급해 주셨던 그 단기 아르바이트들의 시간은 각각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였나요.


단기 알바는 주로 코로나가 유행했던 시기에 각 지자체마다 온도 체크를 해야 하는 일이었어요.

사람들이 많이 방문할 시기에 방문자들의 온도를 체크해 주는 작업을 많이 했어요.

시간은 보통 낮이었죠.

제가 아마도 유일하게 알람을 했던 날들 아니었을까 싶네요.


또 집 주변 핸드폰 가게에서 인형탈 알바를 3달을 했었어요.

전단지 나눠주는 역할이었죠.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1달 정도 했었는데 그것도 나름 서비스업이더라고요.

고객들의 진상 부리는 거랑 질문들 그런 것들이 저에게는 고되게 느껴져서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시간은 밤 11시에서 오전 6시였습니다.



그 각각의 아르바이트를 할 동안의 수면 패턴은 어떻게 됐었나요.


인형탈 알바를 할 땐 새벽 3시 정도에 잠들어 오전 11시 정도에 일어났었어요.

야간 편의점 알바는 알바를 다녀와서 아침 7시 정도에 잠들어 오후 3시에 일어났고요.

코로나 온도 체크 알바를 할 때만 좀 일찍 잠을 청한 기억이 있네요.




그 아르바이트를 할 동안의 식사 해결은 어떻게 했나요?


코로나 온도 체크 알바랑 인형탈 알바는 밥을 제공해 주었고,

편의점에서는 보통 폐기 식품들로 제 굶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무료로 먹을 수 있는편의점 폐기 품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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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두운 면을 맡을 테니


 



은둔 생활을 하면서의 취미는 무었인가요.


시간 남으면 핸드폰 게임이나 영화 보기 유튜브 보기 이런것들이 제 주된 취미였습니다.

알바 등 외출을 하다가 시간이 나면 풍경 사진들을 종종 찍기도 했고요.




 쥬리 풍경 사진, 강 : 하늘이 비칠 정도로 깨끗한 강의 청령함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어쩐지 사진 정말 잘 찍으시더라고요.


예, 뭐 고마워요.



은둔 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외로웠던 시간은 주로 어떤 시간이었나요.


중학생 때부터 외로움에 익숙해졌고 오히려 외로워지는 것이 저에겐 더 편했기 때문에 괜찮은 것 같습니다.

사람을 마주할 일이 생기면 그냥 피곤하기만 하더라고요.



외로움에 익숙해졌다라. 저도 웬만하면 혼자가 편하더라고요.

은둔 생활을 하면서 그 생활 속의 감정선은 주로 어떤가요?


야생 그 자체였죠.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이런 느낌일 겁니다.

굳이 감정을 가지고 은둔생활을 한건 아니니까요.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다가 가고 싶어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현재 은둔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없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너희들은 돈도 벌고 친구도 사귀고 화창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두운 면을 맡을 테니 다른 애들의 미래라도 밝아지면 좋겠습니다.“

라는 말 해주고 싶네요.




쥬리 풍경사진_ 나무, "사진처럼 쥬리님의 화창한 미래를 응원합니다"

 

 




인터뷰에 성실하게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쥬리님 덕분에 저도 많은 걸 공감하고 배워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쥬리님도 밝은 미래를 맞이하기를 바라며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interviewer_우연 | 피할 수 없을 때까지 피한다. 피할 수 없으면 죽는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뭐라도 해야할 때가 온다면 그때의 내가 무언가 하든가 그냥 죽든가 하겠죠.

굶어죽지 않고 놀고 먹는 지금의 삶이 너무 행복하지만

사회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해버려서 왠지 뭐라도 해야할 것만 같은 기분만이 제 유일한 고민거리네요.

그래서 뭐라도 하고 있는 우연이라고 합니다.

fallower9999@gmail.com


 








* 은둔청년 릴레이 인터뷰는 매주 금요일에 업로드 됩니다.

* 인터뷰이 신청도 받습니다. 또는 은둔청년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있으면 보내주세요. (tintin@theseeds.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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