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둔고립 청년들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공간은 자신의 방이다. 바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요새가 되기도 하고, 비밀스러운 아지트가 되기도 하며, 때론 나오고 싶어도 나갈 수 없는 족쇄가 된다. 저 방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알고싶지 않은 걸수도 있고, 전부 포기한 걸 수도 있다. 자꾸 머릿속을 채우는 바깥의 날선 기억이 우리를 옴싹달싹 못하게 하기도 한다.
오늘 만나볼 청년 역시 방 밖으로 나오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이다. 몸과 마음, 일상마저 무너져내리는 경험을 딛고 스스로 문을 열게 되기까지, 과정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그럼에도 지금 여기 나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겨낼 수 있단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이름은 로우토피아라고 하고요, 나이는 서른셋이에요.
본인의 성격에 대해서도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사람들을 좋아하긴 하는데 사람들이랑 깊게 친해지는 게 조금 어려운
사람이랑 깊게 친해지는 게 궁금한 사람이고요. 양가적인 면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과 있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혼자 있고 싶어하는 그런 성격이에요.
두더지땅굴은 어떻게 처음 접하게 되셨나요?
파이 나다운이라고 하는 센터를 통해서 알게 되었던 걸로 기억해요.
오프라인 자조모임터 두더집도 함께 운영되고 있는데 이용하고 계신가요?
아뇨, 사이트만 몇번 들어가 봤던 것 같아요.
평상시에는 어떻게 지내시나요?
지금은 대학원 생활을 하고 있어서, 과제를 하는 데에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 같아요.
월화수 3일은 대학원 때문에 서울에서 생활을 하니까, 굉장히 바쁘고.
목금토일은 대전에 내려와서 집에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두 공간을 오가면서 루틴적인 삶을 사시네요.
그러도록 짜뒀죠. 지금은 학기중이라 그런데, 방학이 되거나 해서 구조가 없어지면
방에 (고립되어) 있을 때의 감각이 올라와서 침대에 누워있을 때가 꽤 많죠.

방에 있을 때의 감각이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기분인지 궁금합니다.
2022년 10월 쯤에서 23년 7월까지 방에만 있었거든요.
그때 방에 있을 때는, 물론 그 당시랑 지금 방에 있을 때랑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앞으로 뭐 하고 살지…? 라는 생각을 많이 한 것 같아요.
확실히, 집에만 있으면 그런 불안이 들죠.
맞아요. 근데 지금도, 내가 뭘 하고 살지에 대해 충실히 준비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때처럼 방안에 누워있다 보면 그때와 비슷한 감각이 들어요.
뭘 위해서 사는가, 뭘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느낌.
사전 조사에서 회사에 휴직계를 낸 게 인생의 터닝포인트라 하셨는데, 이야기를 듣고싶어요.
저는 회사생활 중에 조금 어려운 경험을 하게 됐어요.
제가 좀 특이한 케이스일 수도 있는 게
외적으로 안 좋은 일이 발생해서 휴직을 해야 했던 게 아니라
승진을 하고 좋은 자리에 올라오게 됐을 때 정신적 어려움을 겪게 됐어요.
그게 남들이 보기엔 굉장히 의아한 거죠.
회사 생활도 잘 하고, 남들이 가고자 하는 좋은 자리까지 올랐는데
갑자기 마음이 아프다면서 질병휴식까지 하게 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죠.
좋은 일에서도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고
남들이 이상하다 뭐다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신의 힘든 신호를 스스로 눈치채고
남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쉴 때 쉰것도 현명하다 생각해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향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그때 쉬길 잘했다는 생각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제가 은둔고립이 될 수 있던 것도 휴직을 냈기 때문이거든요.
만약에, 정말 힘들긴 했지만 회사 다니는 것을 유지했다면
울고불고 하면서도 계속 다녔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해요.
물론 그땐 제가 휴직계를 낼 수밖에 없는 다양한 증상들이 있었어요.
후회도 되고 그럴수밖에 없기도 했고… 그게 참 어려운 것 같아요
휴직계, 대학생한테는 비슷하게 휴학 같은 게 있잖아요.
기존의 삶의 구조가 완전히 무너질 수 있는 그런 상황에서
밖으로 나가는 게 어려워지는 고립을 겪게 되었어요.
소중한 경험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외에도 어머니와의 일을 살짝 언급해주셨는데, 자세히 들어볼 수 있을까요?
회사 휴직을 했던 게 은둔 고립으로 들어가게 되는 밑발판이었다면,
어머니께서 사고로 발목을 크게 다치신 사건이 2023년 4월에 있었어요.
제가 한창 방에 있을때. 힘들 때.

(인터뷰 당일 기준) 딱 2년 전이네요.
그때 정말 어려웠거든요.
밖에서 멀쩡하게, 열심히 사는 사회인들을 보는 게 어려웠어요.
그랬는데 어머니께서 크게 다치셔서
제가 어머니를 간병해드리게 됐죠. 엄마 병실에 가서.
그 시간을 보내면서 어쨌든 제가 밖에 나가야 되는 거잖아요. (쓴웃음)
의사 간호사 분들, 많은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 사는 모습을 계속
마주할수밖에 없는 그런 어려운 곳에서. 2주간 간병을 다니면서.
그래도 제가 직접 엄마를 돌보러 가고 싶었어요.
제가 방에 있는 동안 ‘내가 이렇게 된 게 엄마 탓이다’ 라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이렇게 승진까지 하고도 어려움을 겪는 건 내 성격 때문일텐데
그건 엄마가 날 이렇게 키웠기 때문이야, 그때는 이런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는데요.
엄마를 그렇게까지 원망하고 미워한 건 사실 엄마를 굉장히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어머니 간병을 자진해서 갔고, 그 시간에 정말 극진하게 어머니를 돌볼 수밖에 없었어요.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제가 치유를 좀 많이 받았어요.
그렇게 미워했던 엄마를 돌보면서, 엄마에 대한 오해를 스스로 풀어내는 그런 시간을 보냈어요.
그후로 저도 조금씩 회복을 해서 이제 7월에 스스로 밖에 나가고 싶어지는
그런 나아갈 좋은 계기가 되었어요.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어땠는지, 어떤 점이 원망스러웠고
어떻게 풀린 건지 좀더 자세히 듣고싶어요.
일단 가장 컸던 건 제가 딸 딸 아들 삼남매의 둘째거든요.
어렸을때부터 줄곧 들어왔거든요. 엄마가 아들을 많이 낳고 싶어했다고.
엄마가 처음부터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시어머니로부터 아들을 낳으라는 압박이 있었고
그래서 결국엔 어머니가 정말 아들을 원했다고.
그런 이야기 속에서 저는 부모님이 나를 원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게,
태어나서 두살 세살도 되기 전에 남동생이 생겼으니 그때부터 외면받았을 거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서 지금의 내 성격이 이렇게까지
경쟁심이 강하고,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게 편안하지 못하고,
내가 여기서 좀 두드러져야 한다. 내가 내 몫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힘겨운 인간관계를 하는 게 전부 엄마의 탓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 생각을 할 만한 자잘한 사건들도 있었고요.
실제로 충분히 그런 일이 있었을지 아님 오해일지
지금 와서 제 시점에선 다 알 수 없지만
이 마음을 마주하고 받아들이고 로우토피아님이 성장해나가신 부분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지금 대학원에 다니신다고 하셨는데, 은둔고립 이전부터 다니던 건가요?
아니면 은둔고립을 빠져나온 이후 다니기 시작한 건가요?
네. 제가 방에 들어가기 전, 회사에서 승진을 하자마자 바로 증상이 나타났거든요.
그때 당시에 바로 상담을 받기 시작했어요. 좀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라서.
상담을 쭉 받는 과정에서 ‘아, 나도 이쪽 공부를 하고싶다.’ 그런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재작년 10월에 바로 퇴직계를 내고, 심리학과 대학원을 준비해서, 작년부로 다니고 있습니다.
멋있네요. 그 외에도 타자기, 필사같은 언어 관련된 부분에 취미를 갖고 계시다고 해주셨는데
이쪽 취미에 대해서도 자세히 듣고 싶어요.
제가 은둔고립을 하고 있을때 실제로 지적 능력이 정말 많이 떨어졌어요.
그전까진 제가 그래도 기능이 좀 되던 사람이라서,
뭐 글을 쓴다던가 사업 보고서를 쓴다던가 공문을 쓴다던가 책을 읽는다던가
이런 것들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방에 있으면서 책이 안읽히는 순간, 그게 정말 너무나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어요.
지금의 제가 그런 사람을 만나면 괜찮다고,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얘기해 줄 수 있을텐데
그당시에는 제가 이렇게 된 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거든요.

그때 살려고 했던 게 글을 쓰는 일이었어요.
근데 당장 뭘 써야할지 모르겠으니까. 필사 노트를 샀어요.
그걸 사는데에 있어서도, 어제까지 거의 몇달을 아무것도 안하고 방에 누워있었는데
오늘 사야지 결심한다고 바로 사는게 안되니까 한달쯤 뒤에 샀겠죠?
그 한달동안 이것조차 안 하고 여기 누워있네, 하고.
네, 자신을 몰아붙이고. (쓴웃음)
맞아요. 그래도 어쨌든, 언젠가 샀어요. 그래도 바로 잘 써지진 못하죠.
그래서 울며불며, 난 이런 걸 못하게 됐구나. 난 이제 글을 쓸 수 없겠구나.
이제 난 아마도 잡일만 하면서 먹고 살아야 될 것 같다. 그런 걱정을 진심으로 했어요.
그래도 계속 필사를 했고, 상태가 호전된 후에는 타자기 같은 것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힘든 시기에 나로서 살아남기 위해서 택한 생존 취미였네요.
그럼 지금의 삶을 대하는 마음가짐, 스스로의 삶의 자세를 뭐라고 생각하나요?
매번 그렇게 살진 못하겠지만, 지금 떠오르는 건요.
사실 그때 제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었겠죠. 충분히 그 정도로 힘들었고.
어쨌든 저의 의지도 있었고 상담 선생님의 도움이나 기다려주는 가족들도 있었고.
그 덕분에 두번째 삶을 얻은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그런 얘기 종종 있잖아요. 덤으로 얻은 삶, 두번째 삶.
저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 같아요.
앞으로 소소하게라도 해보고 싶으신 일이 있으신가요?
사실 제가 이 인터뷰를 지원한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라도 한번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방에 있던 어느날, 갑자기 어딘가 떠나야 할 것 같았어요.
너무 나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충동적으로, 바로 기차표를 끊어서 대전에서 광주로 갔어요.
거기 가서 뭔가 하고 오면 내가 좀 나아지려나. 정신 좀 차리려나.
거기서 특별한 경험을 하고 오려나 하는 기대도 조금 있었겠죠.
물론 저는 기껏 가서 또 숙소 침대에 누워서 유튜브만 보다 왔거든요.
뭔가 남의 일 같지가 않네요. (웃음)
다를 거 없는 시간 보내고 돌아와서는 역에서 그냥 정처없이 걸었어요.
대전에 사는 내가 갑자기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서 광주 가서,
물론 똑같이 누워서 그냥 유튜브나 봤지만, 어쨌든
공간을 제공해준 광주라는 곳이 참 고맙단 생각이 들었어요.
돌아온 그 대전역에서, 광주에 사는 어떤 만약의 인물을 생각했어요.
만약 광주에 사는 어떤 사람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서 대전을 방문한다면
잠깐 머물렀다 갈 수 있는 곳을 제공해 주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받은 걸 돌려주는 느낌도 드네요.
아 네. 물론 그렇긴 한데, 그걸 넘어서 조금 더하고 싶은 것도 있었어요.
그런 공간에, 유튜브 말고도 좀더 할 수 있는 거.
필사를 하든 그림을 그리든 타자를 치든 뭘 하든.
아무튼 저희가 그런 환경에서 뭔가 창의적인 일을 하기가 어렵잖아요.
빈 방에서 뒹굴거리고만 있는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잠깐이라도 다른 일을 체험할 수 있도록
환기가 될 수 있는 컨텐츠. 그런게 마련되어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거든요.
뭘 하고 싶느냐고 하면, 그런 공간대여 시스템, 혹은 발전되면 숙소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마지막으로, 이 인터뷰를 보게 되실 분들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누가 보게 되려나요, 아마도 저처럼 방에 있는 사람들이 보겠죠?
아마 그렇겠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은 가족이 볼 수도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볼 것 같아요.
그럼 만약, 은둔고립 청년 곁에 있는 분들이 이 인터뷰를 보신다면.
제가 이렇게 밖에 나와서 사람들을 만나고, 기차를 타고 서울을 오가고.
많은 사람들이 있는 교실에서 수업을 다시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제 곁에 있는 가족이 한번도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려주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하거든요.
제가 기다리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라서 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을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드리고 싶고요.
만약 방에 계신 분들이 이 인터뷰를 본다면,
제가 방에 있을 때는 저 혼자 이상한 사람이 됐단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근데 아니라고, 지금도 대전의 어느 방 안에는 오랫동안 당신과 똑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있었다고.
혼자가 아니라고 얘기를 해주고 싶고요.
제가 방에 있을 때 무서웠던 요인 중 하나는
좋아졌다고, 극복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없는 거예요.
인터넷에도 약을 끊기 어렵다는 얘기만 있고.
다시 밖에 나와서, 멋지게 자기 삶을 살아간 얘기가 없는거예요.
제가 그때 마음 상태가 그래서 더 안보였을지도 몰라도
그 당시에 저도 시야가 축소되고 눈앞이 반절이 어두워질정도로 심한 신체화를 겪고
망가졌다, 돌이킬 수 없단 절망감을 많이 겪었는데
그렇게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이 글이
내가 여기 있다고, 나아질 수 있다고 희망을 전해줄 수 있으면 좋겠네요.
*
수많은 좌절과 두려움 속에서 기어이 잠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용기있는 이들이 여기 있다. 인터뷰에 지원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말로 풀어내며 용기있게 사연을 나눠준 청년들. 열린 문틈으로 뻗어나오는 빛이 아직은 너무 따갑게 느껴질지라도, 언젠가 그 눈부신 세상의 구성원으로 모자람 없이 섞여들 것이다. 겁먹지 않아도 괜찮아, 급한 마음 먹지 않아도 괜찮아. 단 한 순간 문이 열린 것만으로도 미래는 충분히 바뀔 수 있을 테니까.
릴레이 인터뷰 2기 完.
은둔고립 청년들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공간은 자신의 방이다. 바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요새가 되기도 하고, 비밀스러운 아지트가 되기도 하며, 때론 나오고 싶어도 나갈 수 없는 족쇄가 된다. 저 방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알고싶지 않은 걸수도 있고, 전부 포기한 걸 수도 있다. 자꾸 머릿속을 채우는 바깥의 날선 기억이 우리를 옴싹달싹 못하게 하기도 한다.
오늘 만나볼 청년 역시 방 밖으로 나오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이다. 몸과 마음, 일상마저 무너져내리는 경험을 딛고 스스로 문을 열게 되기까지, 과정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그럼에도 지금 여기 나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겨낼 수 있단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이름은 로우토피아라고 하고요, 나이는 서른셋이에요.
본인의 성격에 대해서도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사람들을 좋아하긴 하는데 사람들이랑 깊게 친해지는 게 조금 어려운
사람이랑 깊게 친해지는 게 궁금한 사람이고요. 양가적인 면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과 있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혼자 있고 싶어하는 그런 성격이에요.
두더지땅굴은 어떻게 처음 접하게 되셨나요?
파이 나다운이라고 하는 센터를 통해서 알게 되었던 걸로 기억해요.
오프라인 자조모임터 두더집도 함께 운영되고 있는데 이용하고 계신가요?
아뇨, 사이트만 몇번 들어가 봤던 것 같아요.
평상시에는 어떻게 지내시나요?
지금은 대학원 생활을 하고 있어서, 과제를 하는 데에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 같아요.
월화수 3일은 대학원 때문에 서울에서 생활을 하니까, 굉장히 바쁘고.
목금토일은 대전에 내려와서 집에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두 공간을 오가면서 루틴적인 삶을 사시네요.
그러도록 짜뒀죠. 지금은 학기중이라 그런데, 방학이 되거나 해서 구조가 없어지면
방에 (고립되어) 있을 때의 감각이 올라와서 침대에 누워있을 때가 꽤 많죠.
방에 있을 때의 감각이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기분인지 궁금합니다.
2022년 10월 쯤에서 23년 7월까지 방에만 있었거든요.
그때 방에 있을 때는, 물론 그 당시랑 지금 방에 있을 때랑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앞으로 뭐 하고 살지…? 라는 생각을 많이 한 것 같아요.
확실히, 집에만 있으면 그런 불안이 들죠.
맞아요. 근데 지금도, 내가 뭘 하고 살지에 대해 충실히 준비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때처럼 방안에 누워있다 보면 그때와 비슷한 감각이 들어요.
뭘 위해서 사는가, 뭘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느낌.
사전 조사에서 회사에 휴직계를 낸 게 인생의 터닝포인트라 하셨는데, 이야기를 듣고싶어요.
저는 회사생활 중에 조금 어려운 경험을 하게 됐어요.
제가 좀 특이한 케이스일 수도 있는 게
외적으로 안 좋은 일이 발생해서 휴직을 해야 했던 게 아니라
승진을 하고 좋은 자리에 올라오게 됐을 때 정신적 어려움을 겪게 됐어요.
그게 남들이 보기엔 굉장히 의아한 거죠.
회사 생활도 잘 하고, 남들이 가고자 하는 좋은 자리까지 올랐는데
갑자기 마음이 아프다면서 질병휴식까지 하게 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죠.
좋은 일에서도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고
남들이 이상하다 뭐다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신의 힘든 신호를 스스로 눈치채고
남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쉴 때 쉰것도 현명하다 생각해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향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그때 쉬길 잘했다는 생각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제가 은둔고립이 될 수 있던 것도 휴직을 냈기 때문이거든요.
만약에, 정말 힘들긴 했지만 회사 다니는 것을 유지했다면
울고불고 하면서도 계속 다녔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해요.
물론 그땐 제가 휴직계를 낼 수밖에 없는 다양한 증상들이 있었어요.
후회도 되고 그럴수밖에 없기도 했고… 그게 참 어려운 것 같아요
휴직계, 대학생한테는 비슷하게 휴학 같은 게 있잖아요.
기존의 삶의 구조가 완전히 무너질 수 있는 그런 상황에서
밖으로 나가는 게 어려워지는 고립을 겪게 되었어요.
소중한 경험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외에도 어머니와의 일을 살짝 언급해주셨는데, 자세히 들어볼 수 있을까요?
회사 휴직을 했던 게 은둔 고립으로 들어가게 되는 밑발판이었다면,
어머니께서 사고로 발목을 크게 다치신 사건이 2023년 4월에 있었어요.
제가 한창 방에 있을때. 힘들 때.
(인터뷰 당일 기준) 딱 2년 전이네요.
그때 정말 어려웠거든요.
밖에서 멀쩡하게, 열심히 사는 사회인들을 보는 게 어려웠어요.
그랬는데 어머니께서 크게 다치셔서
제가 어머니를 간병해드리게 됐죠. 엄마 병실에 가서.
그 시간을 보내면서 어쨌든 제가 밖에 나가야 되는 거잖아요. (쓴웃음)
의사 간호사 분들, 많은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 사는 모습을 계속
마주할수밖에 없는 그런 어려운 곳에서. 2주간 간병을 다니면서.
그래도 제가 직접 엄마를 돌보러 가고 싶었어요.
제가 방에 있는 동안 ‘내가 이렇게 된 게 엄마 탓이다’ 라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이렇게 승진까지 하고도 어려움을 겪는 건 내 성격 때문일텐데
그건 엄마가 날 이렇게 키웠기 때문이야, 그때는 이런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는데요.
엄마를 그렇게까지 원망하고 미워한 건 사실 엄마를 굉장히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어머니 간병을 자진해서 갔고, 그 시간에 정말 극진하게 어머니를 돌볼 수밖에 없었어요.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제가 치유를 좀 많이 받았어요.
그렇게 미워했던 엄마를 돌보면서, 엄마에 대한 오해를 스스로 풀어내는 그런 시간을 보냈어요.
그후로 저도 조금씩 회복을 해서 이제 7월에 스스로 밖에 나가고 싶어지는
그런 나아갈 좋은 계기가 되었어요.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어땠는지, 어떤 점이 원망스러웠고
어떻게 풀린 건지 좀더 자세히 듣고싶어요.
일단 가장 컸던 건 제가 딸 딸 아들 삼남매의 둘째거든요.
어렸을때부터 줄곧 들어왔거든요. 엄마가 아들을 많이 낳고 싶어했다고.
엄마가 처음부터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시어머니로부터 아들을 낳으라는 압박이 있었고
그래서 결국엔 어머니가 정말 아들을 원했다고.
그런 이야기 속에서 저는 부모님이 나를 원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게,
태어나서 두살 세살도 되기 전에 남동생이 생겼으니 그때부터 외면받았을 거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서 지금의 내 성격이 이렇게까지
경쟁심이 강하고,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게 편안하지 못하고,
내가 여기서 좀 두드러져야 한다. 내가 내 몫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힘겨운 인간관계를 하는 게 전부 엄마의 탓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 생각을 할 만한 자잘한 사건들도 있었고요.
실제로 충분히 그런 일이 있었을지 아님 오해일지
지금 와서 제 시점에선 다 알 수 없지만
이 마음을 마주하고 받아들이고 로우토피아님이 성장해나가신 부분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지금 대학원에 다니신다고 하셨는데, 은둔고립 이전부터 다니던 건가요?
아니면 은둔고립을 빠져나온 이후 다니기 시작한 건가요?
네. 제가 방에 들어가기 전, 회사에서 승진을 하자마자 바로 증상이 나타났거든요.
그때 당시에 바로 상담을 받기 시작했어요. 좀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라서.
상담을 쭉 받는 과정에서 ‘아, 나도 이쪽 공부를 하고싶다.’ 그런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재작년 10월에 바로 퇴직계를 내고, 심리학과 대학원을 준비해서, 작년부로 다니고 있습니다.
멋있네요. 그 외에도 타자기, 필사같은 언어 관련된 부분에 취미를 갖고 계시다고 해주셨는데
이쪽 취미에 대해서도 자세히 듣고 싶어요.
제가 은둔고립을 하고 있을때 실제로 지적 능력이 정말 많이 떨어졌어요.
그전까진 제가 그래도 기능이 좀 되던 사람이라서,
뭐 글을 쓴다던가 사업 보고서를 쓴다던가 공문을 쓴다던가 책을 읽는다던가
이런 것들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방에 있으면서 책이 안읽히는 순간, 그게 정말 너무나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어요.
지금의 제가 그런 사람을 만나면 괜찮다고,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얘기해 줄 수 있을텐데
그당시에는 제가 이렇게 된 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거든요.
그때 살려고 했던 게 글을 쓰는 일이었어요.
근데 당장 뭘 써야할지 모르겠으니까. 필사 노트를 샀어요.
그걸 사는데에 있어서도, 어제까지 거의 몇달을 아무것도 안하고 방에 누워있었는데
오늘 사야지 결심한다고 바로 사는게 안되니까 한달쯤 뒤에 샀겠죠?
그 한달동안 이것조차 안 하고 여기 누워있네, 하고.
네, 자신을 몰아붙이고. (쓴웃음)
맞아요. 그래도 어쨌든, 언젠가 샀어요. 그래도 바로 잘 써지진 못하죠.
그래서 울며불며, 난 이런 걸 못하게 됐구나. 난 이제 글을 쓸 수 없겠구나.
이제 난 아마도 잡일만 하면서 먹고 살아야 될 것 같다. 그런 걱정을 진심으로 했어요.
그래도 계속 필사를 했고, 상태가 호전된 후에는 타자기 같은 것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힘든 시기에 나로서 살아남기 위해서 택한 생존 취미였네요.
그럼 지금의 삶을 대하는 마음가짐, 스스로의 삶의 자세를 뭐라고 생각하나요?
매번 그렇게 살진 못하겠지만, 지금 떠오르는 건요.
사실 그때 제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었겠죠. 충분히 그 정도로 힘들었고.
어쨌든 저의 의지도 있었고 상담 선생님의 도움이나 기다려주는 가족들도 있었고.
그 덕분에 두번째 삶을 얻은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그런 얘기 종종 있잖아요. 덤으로 얻은 삶, 두번째 삶.
저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 같아요.
앞으로 소소하게라도 해보고 싶으신 일이 있으신가요?
사실 제가 이 인터뷰를 지원한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라도 한번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방에 있던 어느날, 갑자기 어딘가 떠나야 할 것 같았어요.
너무 나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충동적으로, 바로 기차표를 끊어서 대전에서 광주로 갔어요.
거기 가서 뭔가 하고 오면 내가 좀 나아지려나. 정신 좀 차리려나.
거기서 특별한 경험을 하고 오려나 하는 기대도 조금 있었겠죠.
물론 저는 기껏 가서 또 숙소 침대에 누워서 유튜브만 보다 왔거든요.
뭔가 남의 일 같지가 않네요. (웃음)
다를 거 없는 시간 보내고 돌아와서는 역에서 그냥 정처없이 걸었어요.
대전에 사는 내가 갑자기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서 광주 가서,
물론 똑같이 누워서 그냥 유튜브나 봤지만, 어쨌든
공간을 제공해준 광주라는 곳이 참 고맙단 생각이 들었어요.
돌아온 그 대전역에서, 광주에 사는 어떤 만약의 인물을 생각했어요.
만약 광주에 사는 어떤 사람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서 대전을 방문한다면
잠깐 머물렀다 갈 수 있는 곳을 제공해 주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받은 걸 돌려주는 느낌도 드네요.
아 네. 물론 그렇긴 한데, 그걸 넘어서 조금 더하고 싶은 것도 있었어요.
그런 공간에, 유튜브 말고도 좀더 할 수 있는 거.
필사를 하든 그림을 그리든 타자를 치든 뭘 하든.
아무튼 저희가 그런 환경에서 뭔가 창의적인 일을 하기가 어렵잖아요.
빈 방에서 뒹굴거리고만 있는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잠깐이라도 다른 일을 체험할 수 있도록
환기가 될 수 있는 컨텐츠. 그런게 마련되어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거든요.
뭘 하고 싶느냐고 하면, 그런 공간대여 시스템, 혹은 발전되면 숙소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마지막으로, 이 인터뷰를 보게 되실 분들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누가 보게 되려나요, 아마도 저처럼 방에 있는 사람들이 보겠죠?
아마 그렇겠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은 가족이 볼 수도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볼 것 같아요.
그럼 만약, 은둔고립 청년 곁에 있는 분들이 이 인터뷰를 보신다면.
제가 이렇게 밖에 나와서 사람들을 만나고, 기차를 타고 서울을 오가고.
많은 사람들이 있는 교실에서 수업을 다시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제 곁에 있는 가족이 한번도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려주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하거든요.
제가 기다리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라서 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을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드리고 싶고요.
만약 방에 계신 분들이 이 인터뷰를 본다면,
제가 방에 있을 때는 저 혼자 이상한 사람이 됐단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근데 아니라고, 지금도 대전의 어느 방 안에는 오랫동안 당신과 똑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있었다고.
혼자가 아니라고 얘기를 해주고 싶고요.
제가 방에 있을 때 무서웠던 요인 중 하나는
좋아졌다고, 극복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없는 거예요.
인터넷에도 약을 끊기 어렵다는 얘기만 있고.
다시 밖에 나와서, 멋지게 자기 삶을 살아간 얘기가 없는거예요.
제가 그때 마음 상태가 그래서 더 안보였을지도 몰라도
그 당시에 저도 시야가 축소되고 눈앞이 반절이 어두워질정도로 심한 신체화를 겪고
망가졌다, 돌이킬 수 없단 절망감을 많이 겪었는데
그렇게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이 글이
내가 여기 있다고, 나아질 수 있다고 희망을 전해줄 수 있으면 좋겠네요.
*
수많은 좌절과 두려움 속에서 기어이 잠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용기있는 이들이 여기 있다. 인터뷰에 지원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말로 풀어내며 용기있게 사연을 나눠준 청년들. 열린 문틈으로 뻗어나오는 빛이 아직은 너무 따갑게 느껴질지라도, 언젠가 그 눈부신 세상의 구성원으로 모자람 없이 섞여들 것이다. 겁먹지 않아도 괜찮아, 급한 마음 먹지 않아도 괜찮아. 단 한 순간 문이 열린 것만으로도 미래는 충분히 바뀔 수 있을 테니까.
릴레이 인터뷰 2기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