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혼자가 아니야."

선비
2024-03-07
조회수 566

"싫어. 안 내려가."


이 말을 몇 번이나 했을까. 나는 내려와서 밥이나 먹자고 전화를 건 친구에게 말했다. 신림동 고시촌에 있는 한 고시원 301호에서 1년 동안 내가 하는 일은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누워 있다거나, 라면을 끓여먹는 일이 전부였다. 그날도 친구는 내게 전화를 걸어 밥을 먹자는 말을 했다.


결국 내려가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이미 없어져버린 자존심의 껍데기를 연료 삼아 내 거부 의지를 불사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자신의 집에서도 먼 신림동 고시촌까지 찾아와서, 밥을 먹자고 하는 친구의 마음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다시 사회로 돌아왔으면 좋겠어.’ 나는 그 마음을 읽었으면서도, 모른 척, 못알아챈 척 하며 강한 거부의 표현을 수화기 너머로 전하고 있었다. 이전의 내 반응에 이미 익숙해진 친구는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내려와, 기다리고 있을게.”라며 나의 다음 말을 막았다.


몸을 일으키고 최대한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옷들을 주섬주섬 입고 나갔다. 내 손으로 문을 열고, 내 발로 신발을 신으며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왔다.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보이는 ‘문 열고 방 밖으로 나오기’가 내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어제의 나는 하지 못했고, 내일의 나는 할 수 있을지 모를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날은 친구의 부름 덕에, 아무일도 아닌 척 문을 열고 방 밖을 나왔다. 계단을 다 내려온 뒤, 고시원 빌라 문 앞에서 서서 나는 생각했다. 


‘나 지금 여기서 뭐하는거지?’ 


외무고시를 합격하기 위해 들어온 신림동 고시촌이었다. 학원 수업을 듣고, 독서실에서 하루 12시간 넘게 공부를 하고, 삼시 세끼 고시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공부했지만 2년 째 낙방 그리고 좌절. 그나마 잘하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에는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다. 아니, 나는 내 생각보다 부족함이 많았다. 원했던 점수는 나오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압박감은 커져 왔다. 모든 시험에서 떨어진 이후 나는 지상의 기생충, 히키코모리가 되어 있었다. 


고시원 빌라 밖의 분주한 소리와 빛에 잠시 멈춰섰다. 큰 가방을 메고 양손에 책을 안고 지나가는 사람들, 합격자들의 이름이 걸려 있는 현수막들 사이에서, 친구는 가만히 내가 내려오는 모습을 보며 서 있었다. 나는 친구의 신발을 길고 깊게 보았다. 눈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고, 친구 주변으로 바삐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친구의 신발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내가 신고 있던 슬리퍼와는 다르게 많은 곳들을 다닌 흔적들이 묻어나 있었다. 나도 저런 신발을 신고, 열심히 걷고 달리던 시기가 있었던가. 없지 않았지만 없었던 것처럼, 마치 애초에 그런 일은 있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친구는 가만히 내 모습을 보는 듯 했다. 그리고 별 말 없이 먼저 발걸음을 움직였다. 나 역시 아무말 하지 않고, 친구의 뒷모습을 좇았다. 친구의 발걸음이 멈춰선 곳은 ‘솟대’라는 이름의 동태탕을 파는 가게였다. 지난 번, 그러니까 두 달 전 내가 이곳에서 동태탕을 참 맛있게 먹었다는 기억이 났다. 나는 몰랐는데, 친구는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생각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동태탕 2인분을 시키고 앉았는데, 친구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다시 사회로 나오라고, 너 이러고 있으면 안된다고 말을 하지 않을까 기대와 동시에  걱정을 했는데 친구는 아무런 말없이 수저와 물을 내게 건네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왜? 뭐?”

“아냐. 라면 그만 먹고 오늘은 밥 먹어. 밥 먹고 갈게.”


때마침 나온 양푼에 담긴 동태탕 2인분이 맛있어 보였다. 공깃밥의 밥알은 윤기가 흘렀다. 언제였지, 내가 밥을 먹었던 적이. 정말 지난 번 이 친구가 내게 사주었던 그때의 동태탕과 함께 먹었던 것이 마지막이었나. 마음이 복잡해졌지만 허기짐이 먼저였다. 말없이 동태탕과 밥을 먹었다. 공깃밥 한 그릇을 먹고 또 한 그릇을 먹었다. 친구는 한 공기로도 충분했는지 천천히 밥을 먹고 있었다. 


텅 빈 양푼과 싹싹 긁어 먹은 밥공기만 남았고, 친구는 또 아무말 없이 먼저 일어나 결제를 하고 가게를 나섰다. 물 한 모금으로 입안을 헹구고 나도 친구를 따라 나섰다. 내가 사는 고시원과 신림역으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는 정류장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친구는 나를 잠시 기다렸다. 가만 서서 내가 다가 오는 모습을 보다가 한 마디를 남기고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밥 먹어, 라면 말고. 또 올게!” 


나는 친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커튼을 그대로 두어 어두컴컴한 방에는 라면 냄새가 강하게 났다. 아침에 먹은 라면, 저녁으로 먹을 라면의 냄새였다. 하지만 내 몸에서는 동태탕의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나는 동태탕의 냄새를 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묵은 무기력을 씻어내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고, 환기를 했다. 커튼을 젖혀 방 안에 햇살을 받아들였다. 


가지지 못한 것보다 가진 것이 훨씬 많았을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고 앞으로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만 빠져 있던 시기였다. 나를 찾는 이는, 먼 곳에 계신 고향 부모님의 전화와 그리고,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한 명의 친구, 이 친구는 변함없이 나를 찾아왔고 위로하거나 충고하거나 비판하지 않았다. 그저 밥 한 끼 사주며 온몸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했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수많은 인간 관계 중 ‘친구’는 수시로 그 거리감이 변한다. 어떤 계기로 인해 가까워졌다가, 또 다른 어떤 계기로 멀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때보다 친구가 필요했던 시기가 있었다. 친구가 사준 동태탕엔 나에게 힘을 내도록 만드는 마음이 있었고, 나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즉 관계 맺어짐이 주는 힘이 있었다. 


만약 그때, 내게 이 친구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이 되어 있었을까, 두려움을 안고 상상해 본다. 친구라는, 인간 관계가 있었기에 지금의 나는, 이렇게 글을 적고 사람들에게 그 고마움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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