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시간을 사랑한다. 좋아한다는 감정을 넘어, '사랑'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시간이 나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만드는 시간은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까.
직장이 있는 사람들은 근무시간이 될 수도 있고, 회사의 굴레에서 벗어난 퇴근 이후의 시간일수도 있겠다.
아이를 기르는 사람들은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일 수도 있고, 아이가 잠든 후 흔히 말하는 육퇴 이후에 간신히 자신을 찾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겠다.
특별한 직장도, 아이도 없는 나는 지금이 나를 위한 시간, 나를 만들어주는 시간이다.
세상은 조용하다. 하루 종일 들리던 창 밖의 자동차 소리도 사람 소리도 지금은 조용하다.
조용하다 못해 곧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해도 믿을만큼의 적막. 대로변에 있는 집인데도 이렇게 조용한 것은
나에게 있어 천만다행이다.
온전한 집중. 무엇에 집중하든 그것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여유를 준다.
이 시간을 사랑하게 된 것은, 이 시간이 나를 만들어주게 된 것은 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학창시절, 공부를 하다보면 하루를 넘길 때가 많았다. 집중하고 또 집중하다가 시계를 보면 날짜가 바뀌어 있던 시간들이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혼자 느꼈던 그 뿌듯함. 간신히 외운 것과 이해한 것들이 뇌 세포에 남아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머리를 살포시 그러안으며, 쓰다듬으며, 살짝의 열기를 느꼈던 그 시간들.
하지만 많은 시간이 지나, 밤의 시간이 내게 고통을 주기도 했다.
사랑해서 만나고 싶은 시간이었지만, 만날 때마다 나를 괴롭혔던 시간.
사랑하는 시간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자, 오늘은 뭘 할 예정이지?"
날짜는 바뀌었고, 잠에 들든 잠에 들지 않든 아침이 밝아오면 나는 무엇인가를 해야 했는데,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하루.
시간은 내게 아무런 감정이 없이 물었을 질문일 수 있지만, 그 질문에 대답을 하기 위해 끙끙 앓았던 시간들은
지금의 나는 이렇게 표현한다.
'나의 은둔고립 시기'
당시에는 은둔고립이라는 표현도 제대로 정착되지 않고, 일본에서 건너온 '히키코모리'라는 표현으로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표현하거나, 영어로 '니트(NEET)'라며, 교육도 직업도 없는 나와 같은 사람들을 크게 크게 묶었다.
시간이 지나 더욱 구체적인 상황들을 사람들이 알게 되고, 이제는 익숙해진 '은둔고립'이라는 단어를, 지금의 나는 붙일 수 있지만
그 단어를 몸소 겪을 때 느꼈던 고통은 잊을 수 없다.
하루가 끝나고, 하루가 시작되고, 아침을 기다리는 시간동안 나는 시간이 주는 질문에 답하고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고 싶은 일과 해야할 일들이 많으니, 지금 너의 질문은 내게 아무런 상처도 되지 않는다,
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만든 '하릴없이'라는 단어처럼, 햐릴없이 그냥 아침을 기다렸다. 대답을 찾지도 않았다.
대답을 찾기보다 술을 찾았다. 취했다. 잊었다. 시간의 질문을 외면했다.
그렇게 내가 사랑하고, 나를 만들어 주던 시간이 내게 던지는 질문을 피하던 시기. 은둔고립의 시기.
이제는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는 시기. 감히 과거형으로 말할 수 있는 시기.
하루의 끝과 시작, 지금 이 글을 적는 딱 지금의 시간 밤 1시 6분이 내게 묻는다.
"자, 오늘은 뭘 할 예정이지?"
대답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오늘 내가 할 일, 오늘 내가 가야할 곳, 오늘 내가 만나야 할 사람.
이미 리스트업 된 채 나의 다이어리에서 '완수'의 의미를 담은 파란색 줄이 그어지길 바라는 일들.
이렇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게 된 것은 기적 같은 일이지만, 결코 기적은 아니다.
처음의 탈출이 있엇고, 이어진 탈출이 있었고, 작은 도약과 큰 도약 그리고 이어진 좌절, 하지만 다시 찾은 발판..
이런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내가 있다.
하루의 끝과 시작, 시간이 내게 묻는다. 그리고 시간이 우리에게 묻는다.
"자, 오늘은 뭘 할 예정이지?"
아주 사소한 대답이, 나의 은둔고립 시기를 벗어날 수 있게 한 첫 번째 대딥이었다.
너무 사소해서 말하기도 부끄러운. 그래서 결국 말하지 않고 이 글의 문을 닫을.
사소한 대답 하나, 찾길.
밤의 시간을 사랑한다. 좋아한다는 감정을 넘어, '사랑'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시간이 나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만드는 시간은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까.
직장이 있는 사람들은 근무시간이 될 수도 있고, 회사의 굴레에서 벗어난 퇴근 이후의 시간일수도 있겠다.
아이를 기르는 사람들은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일 수도 있고, 아이가 잠든 후 흔히 말하는 육퇴 이후에 간신히 자신을 찾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겠다.
특별한 직장도, 아이도 없는 나는 지금이 나를 위한 시간, 나를 만들어주는 시간이다.
세상은 조용하다. 하루 종일 들리던 창 밖의 자동차 소리도 사람 소리도 지금은 조용하다.
조용하다 못해 곧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해도 믿을만큼의 적막. 대로변에 있는 집인데도 이렇게 조용한 것은
나에게 있어 천만다행이다.
온전한 집중. 무엇에 집중하든 그것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여유를 준다.
이 시간을 사랑하게 된 것은, 이 시간이 나를 만들어주게 된 것은 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학창시절, 공부를 하다보면 하루를 넘길 때가 많았다. 집중하고 또 집중하다가 시계를 보면 날짜가 바뀌어 있던 시간들이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혼자 느꼈던 그 뿌듯함. 간신히 외운 것과 이해한 것들이 뇌 세포에 남아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머리를 살포시 그러안으며, 쓰다듬으며, 살짝의 열기를 느꼈던 그 시간들.
하지만 많은 시간이 지나, 밤의 시간이 내게 고통을 주기도 했다.
사랑해서 만나고 싶은 시간이었지만, 만날 때마다 나를 괴롭혔던 시간.
사랑하는 시간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자, 오늘은 뭘 할 예정이지?"
날짜는 바뀌었고, 잠에 들든 잠에 들지 않든 아침이 밝아오면 나는 무엇인가를 해야 했는데,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하루.
시간은 내게 아무런 감정이 없이 물었을 질문일 수 있지만, 그 질문에 대답을 하기 위해 끙끙 앓았던 시간들은
지금의 나는 이렇게 표현한다.
'나의 은둔고립 시기'
당시에는 은둔고립이라는 표현도 제대로 정착되지 않고, 일본에서 건너온 '히키코모리'라는 표현으로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표현하거나, 영어로 '니트(NEET)'라며, 교육도 직업도 없는 나와 같은 사람들을 크게 크게 묶었다.
시간이 지나 더욱 구체적인 상황들을 사람들이 알게 되고, 이제는 익숙해진 '은둔고립'이라는 단어를, 지금의 나는 붙일 수 있지만
그 단어를 몸소 겪을 때 느꼈던 고통은 잊을 수 없다.
하루가 끝나고, 하루가 시작되고, 아침을 기다리는 시간동안 나는 시간이 주는 질문에 답하고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고 싶은 일과 해야할 일들이 많으니, 지금 너의 질문은 내게 아무런 상처도 되지 않는다,
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만든 '하릴없이'라는 단어처럼, 햐릴없이 그냥 아침을 기다렸다. 대답을 찾지도 않았다.
대답을 찾기보다 술을 찾았다. 취했다. 잊었다. 시간의 질문을 외면했다.
그렇게 내가 사랑하고, 나를 만들어 주던 시간이 내게 던지는 질문을 피하던 시기. 은둔고립의 시기.
이제는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는 시기. 감히 과거형으로 말할 수 있는 시기.
하루의 끝과 시작, 지금 이 글을 적는 딱 지금의 시간 밤 1시 6분이 내게 묻는다.
"자, 오늘은 뭘 할 예정이지?"
대답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오늘 내가 할 일, 오늘 내가 가야할 곳, 오늘 내가 만나야 할 사람.
이미 리스트업 된 채 나의 다이어리에서 '완수'의 의미를 담은 파란색 줄이 그어지길 바라는 일들.
이렇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게 된 것은 기적 같은 일이지만, 결코 기적은 아니다.
처음의 탈출이 있엇고, 이어진 탈출이 있었고, 작은 도약과 큰 도약 그리고 이어진 좌절, 하지만 다시 찾은 발판..
이런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내가 있다.
하루의 끝과 시작, 시간이 내게 묻는다. 그리고 시간이 우리에게 묻는다.
"자, 오늘은 뭘 할 예정이지?"
아주 사소한 대답이, 나의 은둔고립 시기를 벗어날 수 있게 한 첫 번째 대딥이었다.
너무 사소해서 말하기도 부끄러운. 그래서 결국 말하지 않고 이 글의 문을 닫을.
사소한 대답 하나, 찾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