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미 씨

땅쿵
202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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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이다. 자기 전 꼽아놓은 충전기 줄이었음에도, 몇 번이나 버튼을 눌러도 전원이 켜지지 않는 휴대폰에 그리 생각했다. 내가 언제 잠들었더라. 좁디 좁은 화장실로 가 창문을 여니 밖은 어둠이다.

고시원이란게 그렇지 뭐. 말로만 듣던 사태를 직접 체감하니 밀려오는 건 두통과 귀찮음뿐이다. 사장님한테 전화도 못하고. 다른 방 사람이 연락하겠지. 그 생각에 조심히 방문을 열었다.


끼이익-, 진회색빛 어둠. 누런색이었을 바닥이 검다. 복도도 불이 나간건가? 어쩌면 건물 전체가 전기가 나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져있었을 때, 네 걸음 정도 떨어진 옆 방의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상체만 내밀고 있다. 왠지 모를 동질감에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전기 나간거죠?"


곁눈질로 마주한 상대는 검은 머리에 창백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어둠 속이라 머리카락이 어디까지 이어진 건지 잘 구분이 가지 않는다. 고개를 돌린 그는 아마 제 목소리를 들었을 것임이에도 그저 멀뚱하게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둠 속이라도 그건 알았다. 


밀려오는 어색함에 열어놓은 제 방안을 슬쩍 보다, 다시 닫혀버리는 옆방 문에 목표에 집중하기로 했다. 방안 스위치 위 고정된 휴대용 조명등을 꺼내들었다. 

문앞에 두었던 검은 슬리퍼를 질질 끌며 복도를 나아갔다. 생각없이 향하다 거칠거칠한 벽에 팔을 스친 탓에 왼손으론 벽을 짚고, 오른손은 손전등을 비추며. 현관이 가까워지는데도 주위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곧 신발장에 도달하고 바닥이 내려간 그곳에 조심히 발을 내리던 찰나, 덜컹-, 쇠가 부딪히는 듯한 큰 소음이 눈앞에서 울렸다. 소스라치게 놀라 열린 문을 바라보니 웬 남성이 그곳에 서 있다. 휴대폰 플래시를 키고 있던 그는 잠시 가만히 있다 고개를 한 번 꾸벅이곤 지나가버렸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도 잠시, 눈앞의 광경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어둡다.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여. 손전등을 비췄는데도 말이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문지르고, 몇 번 깜빡이다 다시 계단을 바라보아도 똑같다. 암흑 뿐. 심해를 비추어 보는 듯한 기분에 한참 멍하니 서 있었던 것 같다. 아까 그 남자는 어떻게 올라온 거지.

하지만 내려가봐야 한다. 어찌되었든. 전기가 들어와야 휴대폰도 충전하니까. 난간이 위치한 곳을 어림짐작해 손을 뻗었다. 그때, 차가운 무언가가 제 손등 위를 덮는다.


"엄마야!"


외마디 소리를 지르기도 잠시 그것은 제 손을 잡아당겼다. 끌려가지 않으려 애를 쓰다 곧 느껴지는 사람의 인기척에 옆을 돌아보았다. 

밧줄같이 검고 긴 머리. 아까 그 옆방 사람이다. 


"왜, 왜요?"


말없이 들어가버렸던 사람. 그는 고개를 젓고 있었다. 


"만지면 안 된다고?"

"네."


귀신같던 외관과 달리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광원 하나가 제가 손전등을 비춘 곳으로 비추어진다. 

노르스름한 동그란 원. 그 납작한 원은 은색의 쇠 난간을 담고 있었다. 아까 아무것도 비치지 않던 때와 달리. 그가 저와 같은 손전등을 들고 있는 것이다.

없던 게 보이자 손전등을 쥔 오른손이 흠칫했다. 등줄기가 싸늘해지는 느낌에 계단, 더 나아가 계단참으로 생각되는 곳을 비추었건만. 또 아무것도 안 보인다. 제 손길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원형 빛 하나. 그러다 그 흐릿한 원 위로 그림자 손이 떠올랐다.

그가 제 손전등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당황함에 고개를 돌리자 그는 그걸 아예 못움직이게 고정시키더니 남은 한 손. 그러니까 손전등을 쥔 그의 손을 어딘가로 뻗었다.


선명해진 원. 두 광원이 합쳐져 만들어진 찌그러진 타원은 정확히 콘크리트 계단참의 일부를 비추고 있다.


"···같이?"


그는 끄덕이며 천천히 제 손전등에서 손을 뗀다. 그에 조심스럽게 손전등을 움직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취를 남기며 움직이는 원에, 다른 원은 그 뒤를 따라간다.


보인다. 눈앞이.

내려갈 수 있어. 그 생각에 우물거리던 입이 트였다.


"그, 제가 비추면 그쪽이, 따라오는?"

"네. 따라가요."


손짓발짓을 해가며 뜻을 표현하자 그가 무심하게 답했다. 암전 속에서도 담담한 목소리다. 문득 그런 기억이 샘솟았다. 이곳 고시원에 들어오던 날, 춤을 배우러 온 일본인 학생이 여럿 있다고. 그래서 조금 시끄러울 수도 있다며 말하던 사장님을. 그와 달리 매일 저녁 10시, 댄스 학원에서 돌아온 모양인지 복도에서 왁자지껄 일 분정도 소란스럽던 그들은 금세 각자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조용한 이들이었다. 눈앞의 이 사람도.


손전등을 돌려 발밑을 비추었다. 곧이어 원 하나가 겹치고 이제 제 발이 보인다. 낡은 검은 슬리퍼가. 한 발을 내딛자 반바지 아래 피부를 감싸는 한기가 느껴졌다. 아침만 해도 매미 소리가 울려퍼졌던 7월 중순의 새벽에.

옆을 보는 대신 나는 아까 얼굴을 마주했던 찰나를 떠올렸다. 밧줄보다는 비단 같던, 검고 긴 생머리. 마른 팔다리. 가늘고 긴 손가락. 앳된 목소리. 그제야 난 그가 그들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다.


계단을 한 칸, 두 칸. 발 밑을 비추는 원이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2층에서 고작 1층으로 내려가는 시간은 벌써 몇 시간이 흐른 것만 같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하나, 하지만 그는 대화를 원치 않아 보였다. 마침내 중간 계단참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도와줬는데...


"이름이?"

"네?"

"이름. 그, name. 나마에? 맞나."

"名前."


어색한 제 발음과 달리 그는 자연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린다. 이름, 학창 시절 배웠던 일본어 수업의 학습 결과, 단순한 단어 구사밖에 저는 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건 알았다. 나마에. 이름. 내 이름. 내 이름은 나도 아니까.


"아, 나는 박. 그냥 박 씨라고 부르면 돼요. 나는 박상?"

"ばくさん."

 

아래쪽을 비추는 손전등 덕에 그가 제 이름을 말하는 입 모양은 보지 못했다. 애초에 제가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고. 그저 그가 저와 함께 비춘 손전등만으로, 그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았다.


"朝海."

"아사이?"

"아사미예요. 제 이름은 아사미."

"아사미 씨."

"당신은 박 씨."


아사미가 뭐지. 아, 사미. 아사, 미? 성이 아니라 이름이려나. 곧 그에게 성만 가르쳐준 자신이 조금 후회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 보고 안 볼 사람인데 뭐. 그럼에도 후회되는 감정은 그리 쉬이 떠나지 못했다.


또 다시 정적이 흘렀다. 길고 긴 시간 뒤, 그리스 신전에서나 볼 법한, 장식들이 세워진 고시원 입구의 벽이 보이자 속으로 안심했다.

이젠 어렴풋이 눈앞이 보인다. 바깥 달빛 덕분일까. 출입구의 유리문 너머로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다. 검은색, 주홍색, 흰색이 섞인 오래된 대리석 타일 바닥. 화려한 장식의 흰 벽. 언제나 맡았던, 목욕탕에서 날 법한 냄새. 그리고 불 꺼진 데스크.


그럼에도 나는 데스크 앞으로 망설임 없이 향했다. 제발, 제발.

손안의 흔들리는 손전등이 이리저리 바닥과 천장을 비추길 반복한다. 내일 출근해야 한단 말이야.


"아."


중얼거렸다. 아치 모양의 구멍이 난 유리창 너머, 불 꺼진 데스크. 그 안은 텅 비어있다. 마찬가지로 암흑 뿐이다.


어쩌지. 저 사람이랑 같이 있어야하나? 여기서 기다려? 핸드폰 있냐고 물어볼까. 근데 핸드폰이 일본어로도 핸드폰인가. 아니면 아까 그 남자가 핸드폰 가지고 있더만. 플래시로 비추고. 그런데 그 사람 몇 호인지 못 봤는데. 묻는 건 또 어떻게 물어···


갖은 생각이 이어지다, 불현듯 몸을 감싸는 세찬 한기에 정신이 들었다. 끼익,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니 그, 아니 아사미 씨는 출입문을 열고 있었다. 

나가려나. 하긴 나가서 친구 만나거나 다른 장소 구하면 되지. 약간의 부러움도 잠시, 나는 그가 문을 활짝 열곤 그대로 멈춰 있다는 걸 눈치챘다. 잠깐 주저하다 그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달리 갈 곳이 없었으니까.


목욕탕의 냄새가 어쩐지 점점 더, 진해진다. 수증기의 향. 값싼 비누 향이 뒤섞인. 


그리고 물의 냄새.


아니야, 이건···


실내와 구분되어 바닥이 푹 패힌 현관에 내려오자, 발에 액체가 채였다. 내려다보니 검은 빛의 물이다. 


따뜻해. 


그리고 볼을 스치는 미지근한 바람. 공기는 순수하기 보단 무언가 부산물이 섞여 있었다. 끈적끈적한 이 느낌. 나는 이걸 알고 있다. 소금기. 


바다다.


바다가 됐어. 주택가가. 이곳 고시원은 언덕 중턱에 위치해 있어, 출입구를 나설 때면 언제나 주택가의 골목을 한눈에 비춘다. 그리고 언덕 저 아래, 목적지처럼 위치한 길의 끝에는...


먼 옛날 놀이동산의 불꽃놀이가 떠오를 만큼, 눈부시게 빛나는 도시. 도시의 야경이 저 멀리 조그맣게 보였다. 발을 감싼 물. 그리고 골목을 가득 채운 바다. 그 지평선에 손전등을 비추어 보았지만 안은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서도. 

건물 안 한기와 정전은 모두 이 바다 때문이었던 걸까? 앞에 있는 그를 힐긋 보자, 무언가 눈치챈건지 그가 제 광원 위로 자신의 손전등을 비춘다. 보이지 않는다.  


"안, 안 보여요."

"·····."

"어쩌죠? 아니, 근데 아까 그 사람은 어떻게 들어 온거야. 그 남자 분 있잖아요. 우리 사는 층에. 길도 여기 하나밖에 없는데···."

"·····."

"아···."


말이 안 통해. 눈만 깜빡이며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에 답답함이 올라왔다. 적어도 말이라도 통했으면 뭐가 달랐나. 아니. 이름 알았다고 처음 보는 여인에게 무언가 유대감이 생긴 줄 알았던 자신이라면 아마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불평, 걱정만 쏟아내고 정작 도움되는 건 하나도 없는 말만 내뱉는. 그도 아마 나와 같은 기분일 거다. 어둠. 눈앞 어둠만큼이나 통하지 않는 언어. 그는 답답할 것이다. 나에게.


"박 씨."


낯선  호칭이 불리자 어깨가 움찔거렸다. 돌아본 그는 무릎을 굽힌 채 검은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귀 뒤로 넘긴 검은 머리에도, 혹시나 그의 머리 끝이 바다에 잠기진 않을까, 걱정되는 풍경이었다.

두 손으로 검은 물을 떠올려, 한참 들여다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물을 담은 손을 제게 살짝 뻗으며.


"박 씨."

"·····."


물을, 아니 이걸 나도 손대보라는 건가? 당신 손 안의 물을? 아니면 여기 바다를 내가 직접? 허둥지둥하다 일단 무릎부터 굽혔다. 풀어헤쳐진 산발 머리, 파마기가 덜 풀린 긴 머리가 그에 얼굴로 넘어온다. 불어오는 바람을 저지하려는 듯이 그걸 귀 뒤로 서툴게 넘겨댔다.


그는 여전히 두 손에 샘물같은 검은 물을 담고 있었다. 마치 숲 속 비밀의 샘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 마냥. 허공에 손을 뻗다, 바다를 힐끗 돌아보다, 결국 그의 두 손 사이로 조심히 검지를 내밀었다. 

. 눈앞의 거친 파도와 달리 조그마한 파동이 그의 가지런한 손안에 퍼져나간다.


···부드러워.


그리고 따뜻해. 발을 감싼 물보다 더. 같은 액체일 터인데. 파동이 전부 사라지고 그가 양손을 쫘악 펼치자, 손 안 물은 전부 바다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이제 물 속에 양손을 집어넣는다. 바다를 저 작은 양손에 전부 담으려는 듯이. 그의 손전등은 어느새 고시원의 입구 쪽에 두어져 있었다. 물이 들어오지 않는 구간에 가지런히. 굽힌 무릎을 펴지 않은 채, 발만 움직여 그의 오른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검지만 바다에 집어 넣었다. 한참 뒤 왼손을 바다에 넣었다. 그리고 또 한참 뒤, 손전등이 아스팔트 도로 위로 내려지고. 이번엔 오른손도 바다에 빠진다. 한참 그의 곁에서 물 속에 손을 넣고 있었나. 순간 조그마한 물벼락이 팔뚝으로 쏟아져 내렸다.


"우왓!"


파도야, 싶었더니 방향은 왼쪽이다. 그쪽을 보려던 순간 다시 물벼락이 덮쳤다. 이번엔 얼굴이다.


"잠, 잠깐만요!"

 

파도가 아니다. 그가 내게 물을 뿌리고 있었다. 진주알 같이 부서지는 파도의 끝처럼, 잎사귀의 이슬만한 물방울들이 제 팔에 맺히고, 얼굴 광대 아래로 흘러내려 갔다. 아기가 물장난을 하는 수준의 물벼락이었다.


하지만 아주 작게, 티 나지 않게 웃고 있는 그를 본 순간, 팔뚝에 힘이 들어갔다.


"···!"


초등학생 시절, 고양이 세수를 할 때 정도의 물벼락이 아사미 씨를 덮쳤다. 젖었다고 말하기에 민망한 상태에서 둘은 서로에게 한참 동안이나 물을 뿌려댔다. 

어느새 두 여인은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누군가는 개구진, 또 누군가는 쑥스럽다는 듯.


양손으로 얼굴을 닦던 아사미 씨가 몸을 일으키자, 저 또한 일어섰다. 그리고 아사미 씨가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 위로 슬리퍼 신은 발을 내밀었을 때, 저도 모르게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자신을 돌아보는 창백한 얼굴에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그저 고개를 내저었다. 아사미 씨가 이전, 쇠 난간을 잡으려던 제 손목을 잡으며 고개를 젓듯.


"가, 가면 안 돼요. 위험하잖아요."

"·····."

"파도도 이렇게··  세고. 분명, 다칠 거예요."


알아듣고 있는 지도 모를 말들을 내뱉었다. 단순히 저 너머로 가면 안 된다. 그건 알았다. 제 이름만큼이나. 온갖 파도가 피부를 따갑게 할퀴어버릴 것이 당연하다. 알 수 없는 검은바다 속 생물이 심해의 언어를 속삭이며 저를 바다 밑으로 끌고 갈 것이 당연하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심해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제 손을 조심히 떼어낼 뿐이었다. 또 그가 바다로 나아갈까, 다급히 입을 열었다.


"위험해요. 위험해. d, danger? 영어는 혹시 몰라요?"

"박 씨."

"·····."

"가야 해요. 알잖아요."


선명하게 들리는 두 단어. 

가야 해. 알잖아.


스무 해 넘게 살아오며 들어온 낯익은 단어임에도, 아사미 씨의 입에서 나오는 그것들은 달랐다.


박 씨. 이러면 안 돼. 알잖아. 다른 사람들은 말 안 해도 잘 알더만 박 씨는 어떻게···

빨리 가.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제대로 좀 해봅시다. 박 씨···· 


"네?"

 

기억 속 누군가의 다그치는 말과, 제 목에서 튀어나온 새된 소리가 겹쳤다.


"내 이름."

"···아사미 씨잖아요."

"뜻을 몰라요. 박 씨가."

"···?"

"나도 몰라요. 박 씨 이름 뜻."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저 성이다. 흔하디 흔한, 같은 성을 지닌 수천 명의 사람들 중 하나. 거기에 뜻이 있을 린 만무했다. 그저 존재하는 것 뿐이다. 뭐라 말해야 할 지 몰랐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학생일 아사미 씨. 저보다 어릴 게 분명한 그에게 나는 일말의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눈앞의 존재가 바다로 뛰어드는 걸 적어도 막는 것. 하지만 아사미 씨는 담담히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あしたの海."

"아시타?"

"미안해요. 나도 몰라요. 한글 뜻을."


어느새 발목까지 올라온 물에 파도가 치며, 무릎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바다속에 둘 다 두 발로 서 있다는 걸 망각한 채, 아사미 씨는 정면의 야경을 가리켰다. 도시의 야경을.


"あした. 빛. 태양···."

 

야경은 그래. 태양처럼 빛나긴 했다. 아시타가 대체 뭔데? 지금은 밤인데 어째서 그는 빛과 태양을 입에 담은 걸까. 그리고 왜 저 도시의 야경을 가리킨 걸까. 


그는 곧 발 아래로 손가락을 향했다.


"여기 없는 것."

"없는 것?"


밤, 어둠. 여기 없는 것이란. 빛과 내 딛을 땅이 없다. 길도 없다.

하지만 그가  빛과 태양을 언급했으니 여기 없는 것이란, 빛이 맞을 것이다.


여기 없는 빛.

여기 없는 태양.

아시타는 빛과 태양의 뜻을 담고 있다.

밤, 여기 없는 낮.


아시타는··· . 밝아올 태양이다. 다음 날 찾아오는.

내가 가장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것.


"···내일."

"내일."


작게 말하자 그걸 들은 건지 아사미 씨가 따라 말했다. 그가 이 단어를 알지 모를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학생인 그가 저보다 어른스러워 보이는 모습에 원래의 저라면 조금 움츠러들 만도 했으나. 


이상하게 두 발은 물 속에서 굳건하게 서 있었다. 따뜻한 액체가 감싸주는 땅. 어쩐지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海."

"우미?"

"여기. 우리가 있는 곳."


아래를 보자 네 개의 발목만 둥둥 떠다니는 검은 물이 보였다. 우미. 바다? 내일, 바다.


"아침 바다? 아사미 씨, 나마에."


그가 말없이 또 고개를 끄덕인다. 몇 시간 뒤 찾아올 아침. 그런 다음 날의 바다. 아침의 바다. 희망.


아사미 씨가 어째서 바다로 들어가려 하는지, 혹은 건너가려 하는지. 저리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곳을 들어가려 하는 것을 이해해버렸다. 

태어나서 이름을 부여받고, 아름다운 이름을 받은 아사미 씨는 이곳에 옴으로써 존재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바다에도 아침은 찾아오니까. 제 아무리 빛 한점 들지 않는 심해라도. 그곳에도 그곳만의 아침이 오니까.


"박 씨는?"

"내 이름? 나의··· 저, 나마에?"

"네."

"·····."


단순한 성에 의미는 없다. 한자로도 쓸 줄 모르는 제 성 씨. 단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성일 뿐. 내가 한 가족에서 태어났다는, 누군가의 자식이라는 지표일 뿐이다. 발을 감싼 온기만 느끼다, 머뭇거리며 말했다.


"미안해요. 없어요. 내 뜻은."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아사미 씨에게 알려준 건 이름이 아니라 성 씨라서. 성 씨는 그···. 아, 이걸 어떻게 말하지."


파도 소리만 철썩이는 주택가 한 가운데. 언덕 위에서 아사미 씨는 내 말을 기다려주고 있었다. 그때, 귀를 틀어막는 듯한. 모든 소리를 묻어버릴 법한 소음이 주변을 가득 채운다.


얼굴을 드니 저 멀리, 아주 저 멀리. 빨간빛이 점멸하는 비행기 한 대가 상공을 가로지르고 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아사미 씨가 말 대신 저 먼 야경을 가리키던 게 떠올랐다. 그대로 머리 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저, 저거예요. 저거!"


비행기, 광대한 하늘. 


내 이름··· 


"내 이름. 크게 되라고. 비행기처럼 빠르게 날아갔으면 좋겠다고, 어머니가···"

"저것이 박 씨의 이름?"

"네."


멍하니.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비행기를, 하늘을 구경하던 아사미 씨는 소음이 잦아들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어라 할 말을 고르는지, 입을 달싹이던 그는 이내 작게 웃는다.


"어울려요."

"···제가요?"

"行動が速い- 음, 빨랐어요, 박 씨."


그리고 그는 물 위에서 걷는 동작을, 주먹을 쥔 손으로 허공을 향해 내젓는 동작을 해 보인다. 아까 제가 어둠 속, 겁먹어 손전등을 이리저리 흔들던 모습과 똑 닮았다.


그걸 멀뚱하게 보다, 하하 웃어버렸다. 얼마만이더라. 오래 앉아있다 일어설 때 허리에 무리가 가듯이, 볼 아래 입 근육이, 진동하는 이 근육이 어색했다. 눈가로 핑 도는 물기는 아마 소금기 때문일 거다. 파도가 치고 간 발목 위론 벌써 흰 소금기가 메마르기 시작했으니까.


"아사미 씨도 어울려요. 나마에. 예뻐요. 이름이."

"감사해요."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입가에 미소를 띄우던 아사미 씨는 잠시 뒤 원래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또 다시 한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그를 잡지 못했다. 그냥 쳐다보며. 이젠 안절부절할 뿐이다. 그럴 듯한 만류도 이제 하지 않는 자신. 지금 내가 뭐가 되어버린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지금의 나를 몰랐다.


마음의 소리가 새어나간 걸까. 아사미 씨가 멍청하게 멈춰 서 있는 제 쪽을 향해 뒤돌았다.


"박 씨는?"

"예? 아. 저, 저는···"


고민하다 손을 가로질러 만든 엑스 자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 전 여기 있을게요. 미안해요. 안 돼요."


한 걸음, 한 걸음. 아사미 씨가 천천히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는 멈춰섰다. 한 두 발자국 정도 떨어진, 적당한 거리에서.


그리고 손 하나가 제 앞에 내밀어졌다. 자신보다 고운 손. 하지만 가까이서 본 그 손은, 군데군데 찰과상의 흉터라든지, 춤을 추며 바닥에 이리저리 까진 듯한 상처 등. 무언가에 몰두하여 얻게 된 장인의 손에 가까웠다. 그에 비해 제 손은 멀쩡했다. 그래.


학생이라 생각했던 아사미 씨의 손은 저보다 훨씬, 세월의 흔적이 녹아 있었다. 눈을 마주한 그의 얼굴은 웃고 있지 않다. 오히려 긴장한 얼굴이다.


타인에게 처음 다가갔을 때,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더라. 아마 이런 얼굴이었을지도.


조심스레, 그가 내민 손에 하나 둘, 네 손가락을 올렸다. 초등학교 시절 막무가내로 뽑힌 짝꿍의 손을 처음 잡게 된 순간만큼이나 어색했다. 아사미 씨도 아마 그럴 거다.


그가 한 발자국 나아가면, 무거운 추를 이끌듯 내 왼발을 물속에서 끌어당겼다.

무자비한 규율의 수압 속에서, 땅 위 생명체가 한 걸음을 내딛는다.


첨벙-


반동에 튀어오른 물방울. 소금기가 메말라 있던 발목이 다시 바닷물로 젖어든다.


첨벙- 

퐁당.

첨벙, 풍덩-


3평 남짓한 나의 임시적인 세상, 방 안의 심해.

육지보다 바다가 더 넓다는 이 세상의 심해. 

어느 쪽이 더 나을까. 전자는 그저 익숙한 것 투성이, 사방이 막힌 내 세상이었다면, 눈앞 이곳은 적어도 나아갈 틈새가 있었다.

하지만 길이 없다. 목적지도 없다. 이 여행의 목적지라 하면?

저 야경들? 혹은 이 작은 바다 너머? 혹은


이 물 아래?


아침, 회사에서 돌아올 때의 길거리의 광경들로 아마 가득 차 있을 이 바닷속. 더 새로운 발견이 있긴 할까.


이번의 어둠은 아사미 씨가 앞장섰다. 그 다음의 길에선 나일까? 저 멀리 도시의 야경만을 응시하며, 나는 그렇게 발을 끌어다 옮기는, 맞잡은 손의 감각만을 실감하며 목전의 현실에 집중했다.


가야만 해. 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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