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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의 시대, 유리창이 깨진 자리에서

2026-02-17
조회수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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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이전, 대한민국은 하나의 통유리창과 같았습니다. 정부와 대기업과 가정이 암묵적 약속으로 단단하게 결합된 그 유리창은 바깥의 비바람을 막아주었고, 그 안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안전함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평생직장'이라 불렀고, '한강의 기적'이라는 이름의 보호막이라 믿었습니다.

IMF 외환위기는 단순한 경제 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단해 보이던 그 유리창을 향해 날아온 치명적인 돌이었습니다. 굉음과 함께 유리는 산산조각 났고, 가장 먼저 바닥으로 쏟아진 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거대 조직의 보호막 안에 머물던 노동자들이, 유리가 깨짐과 동시에 거리로 내던져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수많은 자영업자와 영세 중소기업의 난립은 그 폭발의 잔해이자, 깨진 유리창의 파편들입니다.

거리에 넘쳐나는 치킨집, 편의점, 대기업의 하청을 전전하는 작은 공장들. 이들을 '창업의 열기'나 '경제의 역동성'으로 포장하는 것은 잔인한 일입니다. 이들은 더 넓은 세상으로 스스로 나아간 모험가가 아니라, 유리가 깨질 때 튕겨져 나온 파편들입니다. 살기 위해, 혹은 더 이상 머물 수 없어서 떠밀려 나온 비자발적 독립의 결과물입니다.

유리 조각은 날카롭습니다. 파편으로서의 자영업과 중소기업은 필연적으로 서로를 찌르는 과당 경쟁의 운명을 짊어집니다. 좁은 골목 상권에 모여 있는 가게들은 바닥에 깔린 유리 가루처럼 서로 부딪히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칩니다. 바닥의 노동은 가치를 축적하지 못하고, 임대료와 이자와 단가 후려치기로 증발해버립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카로운 파편들이 깔린 바닥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우리는 기이한 현기증을 느끼게 됩니다.

바닥은 아수라장인데, 머리 위에는 초고층 주상복합 타워들이 위압적으로 솟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마천루들이 들어선 것은 성장의 결과가 아닙니다. 저금리 기조 속에서 갈 곳을 잃은 유동성이, 고용을 창출하는 위험한 투자 대신 이미 가격이 검증된 부동산으로 몰려든 결과입니다. 아파트 개발 사업과 부동산 세제의 허점이 그 흐름을 가속화했습니다. 실물 경제가 멈춰버린 자리에, 돈이 몰려와 쌓아 올린 욕망의 탑들입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 지은 보금자리라기보다, 자산을 저장하기 위해 지은 차가운 금고에 가깝습니다.

소멸해가는 지방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전례 없이 화려해지는 이 역설.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떠나고 빈집은 늘어가며 도시의 혈관은 말라가는데, 그 도시에 꽂힌 콘크리트 기둥들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져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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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의 풍경은 수직적으로 양분되어 있습니다. 발밑에는 깨진 유리창의 파편들이 날카롭게 흩어져 있고, 머리 위에는 그 파편들과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매끈한 타워들이 구름 속으로 솟아 있습니다.

빈부격차는 이 '바닥'과 '하늘' 사이의 이동이 막혀버렸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과거에는 성실하게 일하면 중산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사다리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유리가 깨지면서 그 사다리도 함께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제 바닥에 남겨진 사람들은 유리 조각 위에서 서로의 몫을 뺏는 제로섬 게임을 벌이고 있습니다. 반면 자본은 바닥의 아우성에 관심이 없습니다.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땀이 돈을 버는 속도를 조롱하듯 앞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진짜 번영은 생산과 분배가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 바닥이 단단해지고 넓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번영은 다수의 파편 위에 소수의 타워가 뿜어내는 빛으로 전체 평균을 올리는 통계의 착시입니다. 사람들은 이 불안을 감추기 위해 명품을 두르고 비싼 차를 타며 '나도 저 하늘에 속해 있다'는 신호를 필사적으로 보내지만, 그것은 빚으로 쌓아 올린 얇은 도금일 뿐입니다.

우리는 지금 깨진 유리 조각 위에서 발이 베이는 고통을 참으며, 괜찮아 보이기 위해 웃으며 춤을 추고 있습니다. 이것이 '선진국'이라는 이름표 뒤에 감춰둔, 위태롭고 서글픈 가짜 번영의 민낯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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