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써도 되는지 한참을 고민했다.
왜냐하면 이 글은 극단적 선택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주제에 대한 표현을 공공에 표현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반응이 만들어 질 수 있어 가능한 한 쓰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이 곳에 거의 글을 남기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 제주 청년학교에 있으면서 많은 것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몸과 마음이 조금씩 바뀌고 있으며, 이것이 내가 글을 쓸 수 있게 한 것 같다. 이런 기회를 제공해 준 많은 분들께 감사를 표한다.
1. "죽고 싶다"는 생각
대학교 1학년 때 집단 상담 프로그램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한 다섯 명 즈음 되는 사람들과 함께 참가했는데, 프로그램이 끝나고 그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지금 여기서 구너님이 가장 심각해요."
처음에는 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상태인지 확실하게 몰랐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을 거라 믿었던 나는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던 거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는 "죽고 싶다" 라는 생각이 있다. 삶이 두렵고 고통스러우며, 죽으면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날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그런 생각이 강해질 때마다 두 글자 검색어로 포털 사이트를 검색한다. 아직도 생각보다 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연관 검색어를 계속해서 검색하다 보면 여러 가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사례를 보게 되는데,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 중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하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는 것이다. 뭐 아직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그런 사람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들이 틀렸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왜 한번도 시도를 해 보지 않았어요?" 라는 질문을 하니 부끄러운 답이 나왔다. 죽는 것이, 정확히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스스로 죽는 것은 쉽지 않다. 나의 몸이 필사적으로 그것을 막으려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간은 지체되고 고통을 받는 시간은 길어진다. 그것이 두려웠다. 나는 초등학생 때 당했던 이른바 "기절 게임" 방식으로 죽기를 원하고 있다. 목을 졸리면 그 때의 기억이 아예 없다는 것을 실전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최근에 다음 단계로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 방법을 모색하는 단계이다. 이 다음 단계는 시도 단계이고 성공하면 내 인생은 그걸로 끝이다.
2. 남겨진 사람들은?
이 행동은 극도로 이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당사자인 나만 끝일 뿐 나와 연관된 모든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그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가족들은 "자살 유가족"으로 불리는 단어가 따로 있다. 소중한 사람이 스스로 죽는 경우 그 가족들은 자기의 부주의함, 무관심 때문에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며, 당사자가 겪는 것과 같은 고통을 받게 된다. 그들의 삶 자체가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워진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끝냈다는 사실을 주변에도 알리기 힘들기 때문에 주변에 도움을 청하기도 쉽지 않다.
이 생존자들이 말한 내용들로 인해 나는 삶을 계속 연장할 수 있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무책임함 때문에 하지 못했다. (여태껏 했던 시도들도 겨우 포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런 두려움이나 죄책감이 조금씩 옅어져 가고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사실 행동으로 옮기는 동기 중 하나는 "살고자 하는 의지"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지금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와 합쳐져 오히려 삶을 파괴하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전의 나는 그 의지가 없었다. 그 의지보다 두려움이 더 강해 은둔을 선택한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문제는 요즘에 그 의지가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청년학교의 강도높은 일정을 소화하면서 마음과 몸이 조금 회복되었는데, 이것이 엉뚱한 부분을 강화시키고 있다. 여태껏 삶을 이어왔던 균형이 깨지고 있었고, 나는 이에 대해 선택을 해야 한다. 지금의 나 자신을 죽이는 것, 혹은 지속하는 것.
3.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일요일 내내 이런 생각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숙소 내 남은 음식을 파악해서 점심과 저녁식사를 먹고, 쓰레기통을 비워 재활용 센터까지 걸어가 보기도 하고, 그러다 지쳐 쓰러지면 그대로 잠에 들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계속되는 생각에 빠져들게 되기 때문이다.
넋두리일 수도 있고, 나름의 구조 요청일 수도 있다. 이중적인 나는 아직도 "살고 싶다"는 생각 또한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자신이 없어 의견을 구하는 것도 있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싶어 대화를 시작해 보기로 했다. 살고 싶은 생각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이런 나라도 살아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죽어야 하는지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나는 나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 글을 써도 되는지 한참을 고민했다.
왜냐하면 이 글은 극단적 선택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주제에 대한 표현을 공공에 표현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반응이 만들어 질 수 있어 가능한 한 쓰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이 곳에 거의 글을 남기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 제주 청년학교에 있으면서 많은 것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몸과 마음이 조금씩 바뀌고 있으며, 이것이 내가 글을 쓸 수 있게 한 것 같다. 이런 기회를 제공해 준 많은 분들께 감사를 표한다.
1. "죽고 싶다"는 생각
대학교 1학년 때 집단 상담 프로그램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한 다섯 명 즈음 되는 사람들과 함께 참가했는데, 프로그램이 끝나고 그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지금 여기서 구너님이 가장 심각해요."
처음에는 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상태인지 확실하게 몰랐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을 거라 믿었던 나는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던 거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는 "죽고 싶다" 라는 생각이 있다. 삶이 두렵고 고통스러우며, 죽으면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날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그런 생각이 강해질 때마다 두 글자 검색어로 포털 사이트를 검색한다. 아직도 생각보다 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연관 검색어를 계속해서 검색하다 보면 여러 가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사례를 보게 되는데,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 중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하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는 것이다. 뭐 아직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그런 사람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들이 틀렸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왜 한번도 시도를 해 보지 않았어요?" 라는 질문을 하니 부끄러운 답이 나왔다. 죽는 것이, 정확히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스스로 죽는 것은 쉽지 않다. 나의 몸이 필사적으로 그것을 막으려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간은 지체되고 고통을 받는 시간은 길어진다. 그것이 두려웠다. 나는 초등학생 때 당했던 이른바 "기절 게임" 방식으로 죽기를 원하고 있다. 목을 졸리면 그 때의 기억이 아예 없다는 것을 실전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최근에 다음 단계로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 방법을 모색하는 단계이다. 이 다음 단계는 시도 단계이고 성공하면 내 인생은 그걸로 끝이다.
2. 남겨진 사람들은?
이 행동은 극도로 이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당사자인 나만 끝일 뿐 나와 연관된 모든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그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가족들은 "자살 유가족"으로 불리는 단어가 따로 있다. 소중한 사람이 스스로 죽는 경우 그 가족들은 자기의 부주의함, 무관심 때문에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며, 당사자가 겪는 것과 같은 고통을 받게 된다. 그들의 삶 자체가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워진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끝냈다는 사실을 주변에도 알리기 힘들기 때문에 주변에 도움을 청하기도 쉽지 않다.
이 생존자들이 말한 내용들로 인해 나는 삶을 계속 연장할 수 있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무책임함 때문에 하지 못했다. (여태껏 했던 시도들도 겨우 포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런 두려움이나 죄책감이 조금씩 옅어져 가고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사실 행동으로 옮기는 동기 중 하나는 "살고자 하는 의지"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지금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와 합쳐져 오히려 삶을 파괴하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전의 나는 그 의지가 없었다. 그 의지보다 두려움이 더 강해 은둔을 선택한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문제는 요즘에 그 의지가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청년학교의 강도높은 일정을 소화하면서 마음과 몸이 조금 회복되었는데, 이것이 엉뚱한 부분을 강화시키고 있다. 여태껏 삶을 이어왔던 균형이 깨지고 있었고, 나는 이에 대해 선택을 해야 한다. 지금의 나 자신을 죽이는 것, 혹은 지속하는 것.
3.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일요일 내내 이런 생각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숙소 내 남은 음식을 파악해서 점심과 저녁식사를 먹고, 쓰레기통을 비워 재활용 센터까지 걸어가 보기도 하고, 그러다 지쳐 쓰러지면 그대로 잠에 들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계속되는 생각에 빠져들게 되기 때문이다.
넋두리일 수도 있고, 나름의 구조 요청일 수도 있다. 이중적인 나는 아직도 "살고 싶다"는 생각 또한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자신이 없어 의견을 구하는 것도 있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싶어 대화를 시작해 보기로 했다. 살고 싶은 생각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이런 나라도 살아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죽어야 하는지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나는 나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