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호] "히키코모리"개념의 확대 - 누구나가 히키코모리가 되는 시대를 돌아보다 〈전편〉

"히키코모리"개념의 확대

 - 누구나가 히키코모리가 되는 시대를 돌아보다 〈전편〉

(HIKIPOS 2018-12-14호에서 번역·전재)


글 : 보솟토 이케이다      번역 : 함, 홀로(두두 서퍼터즈)  



필자 30살, 헝가리에서 불가리아로 가는 여정에서 


편재하는 "히키코모리"



오늘날 "히키코모리"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원래 예전부터 적지 않게 세계 각지에 있었겠지, 

그렇게 나는 생각하고 있다.


즉, 히키코모리들은 분명

현대 일본 사회나 고도산업사회만의 특유한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사회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에든 일정 수의 사람들이 "그 외의 다수 세력"에 적응하지 못하고

오늘날 우리들이 "히키코모리"라고 부르는 상태가 되었을 테고,

지금도 또한 그러겠다고 생각한다.


반세기 전, 1960년대에 학원 분쟁으로 세월을 보낸 젊은이들의 생활은

지금의 "소토코모리(외유형 은둔 외톨이)"계 히키코모리들과 굉장히 비슷한 부분들이 보인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부여잡을 수 있는 아직 나이브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그것이 있었기에 그들은 "히키코모리"로 여겨지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세대에 있어서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특히 베를린 벽의 붕괴가 그렇다.

그렇다면 아무리 정치의식이나 이상성이 높아도

이데올로기에 편승해 행동할 수는 없게 된

젊은이들은 많아지게 된다.

그들이 방 안에서 끙끙 앓고 있으니

"히키코모리"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공적인 통계가 없을 뿐,

유럽에서도 수많은 히키코모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탈리아 제일가는 히키코모리 관련 단체인 "히키코모리 이탈리아"의 대표 마르코 크레팔디의 말에 의하면

이탈리아 국내의 히키코모리 인구는

2018년 12월 시점의 최신 자료로 약 100,000명으로 산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숫자도 이후 더욱 늘어날 것이라 보고 있다.

이탈리아는 작년에 "히키코모리 원년"을 맞이했을 뿐으로,

아직 "hikikomori" 라는 단어에 대한 인지도가 낮다.

이후 더욱 많은 히키코모리가 "발견" 될 것이다.


이탈리아뿐만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파리는 이번 2018년이 "히키코모리 원년"이었다.


또한 앞서 본지에서 전한

필리핀의 히키코모리와의 대화(*1)는

그 증명까지는 아니어도,

경제 수준 여하와 관계없이

이 지구상의 모든 사회에 히키코모리가 있는 것 같다고

추론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의 하나가 되었다.


1. "필리핀의 히키코모리 당사자 CJ와의 대화" 제 1회

http://www.hikipos.info/entry/philippines_r1_jap




과거에 “히키코모리”의 존재를 찾아서


이처럼 일본 국외 히키코모리의 존재는 증명되었다.

그렇다면 과거 히키코모리의 존재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현재에서 과거로 타임슬립 하지 못하는 이상,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끈기를 가지고 몰두할 수 있을 때 가능한 방증법으로는

미쉘 푸코가

《광기의 역사》(1961년)

《성의 역사》(1984년 미완)

들을 썼을 때와 같은 방법으로

과거의 에크리튀르(글)에 쓰인

“히키코모리”

을 발굴해 보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노자, 디오예니스, 달마 대사, 겐코 법사와 같은 이름들이

일단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러나 그들은 “히키코모리”라고 불리지는 않았다.


“히키코모리”라는 말 내지, 음운은

과거 히키코모리의 존재를 발굴해내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히키코모리”라는 일본어는

“당기다(引く)”와 “담기다(籠る)”라는

옛날부터 쓰여 온 일반적인 동사의 합성이므로,

일본어에 있어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어휘이다.


바꿔 말하자면, “히키코모리”라는 말은

“츤데레(ツンデレ)”라던가 “넷우익(ネトウヨ)” 과 같이

작금의 조어처럼

부자연스러운 창작으로 출현한 어휘는 아니다.


때문에 헤이안 시대의 시인들 또한

“히키코모리”라는 단어를 사용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옛날부터 있었을지도 모르는 “히키코모리”는

그러나 요즘 말하는 “히키코모리”와는

뉘앙스가 달랐으리라는 것은

일본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상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쓰이는 “히키코모리”는

어떻게 퍼져나가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말에 붙어 있는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이제와서 그런 걸이러 말씀하는 분도 많겠으나,

아직 오해하고 있는 분도 있는 듯하므로,

2018년이 끝나기 전에 지금 다시 한번 정리해 두려고 한다.




오늘날 말하는 “히키코모리”의 기원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어가 아닌 것에 도달한다.


1980년 미국의 정신의학회에서

세계의 정신장애 진단 기준으로써 발표한 DSM-Ⅲ 중에

진단명은 아니고 조현병이나 우울증의 증상의 일환으로써


“Social Withdrawal(사회적 위축)”


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어 있다.


이를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 “히키코모리”이다.

일본에서는 1989년에 공적인 문서에서 등장했다.


80년대에는 등교거부증 등으로 불리다가,

이윽고 부등교(不登校)라 불리게 되었다.

일부 아이들의 생활 연장선상으로,


1990년대, 이 “히키코모리” 현상이 맹렬히 지적되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지식인이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히키코모리”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즈음 “히키코모리”에 대해 발간된 책에는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1995년

아사히 신문 학예부의 시오쿠라 유타카가 히키코모리에 관한 기사를 시리즈로 연재하기 시작함.


1996년

다나카 치호코 “히키코모리 - ‘대화하는 관계’를 되찾기 위해” 사이언스사


1997년

이케가미 마사키 선데이 매일에서 “히키코모리”에 관한 비정기 연재를 시작함.


1998년

사이토 타마키 “사회적 히키코모리 -끝나지 않는 사춘기” PHP신서


1999년

시오쿠라 유타카 “은둔하는 사람들” 빌리지 센터

(아사히 신문의 연재를 개정, 서적화)


1999년

콘도 나오지, 쿠라모토 노부히코, 하세가와 토시오 외 “히키코모리의 이해와 원조” 萌文社


2000년

토미타 후지야 “신·히키코모리로부터의 출발” 하트 출판


카노 리키하치로, 콘도 나오지 “청년의 히키코모리 -심리사회적 배경, 병리, 치료원조”  이와자키학술출판사


2001년

이케가미 마사키 “‘히키코모리’ 생존기 -지원 활동 보고” 소학관문고

선데이 매일의 연재를 모은 것




“원형적 히키코모리상(像)”의 탄생


위와 같이 올린 리스트는

오늘날 말하는 “전문가”가 히키코모리를 비평하여 정리한 것이지만,

이즈음에는 이미

현재의 당사자 발언의 선구라 할 수 있는

히키코모리 당사자나 가까운 입장에서의 서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2000년 다구치 란디 “콘센트”

히키코모리를 거론한 소설. 모델은 작가의 오빠.


2001년 카츠야마 미노루(*2) (히키코모리 당사자)

“히키코모리 캘린더”를 출판.


2001년 우에야마 카즈키 (히키코모리 당사자)

“‘히키코모리’였던 나에게서”를 출판.


2001년 타키모토 타츠히코 (히키코모리 당사자)

“NHK에 어서 오세요”(소설)을 출판.

애니메이션화 되어 세계적으로 대히트.


2001년 무라카미 류 “지상에서의 마지막 가족”

히키코모리를 소재로 한 소설. TV드라마화된다.


2001년 아베 가즈시게 “닛뽀니아 닛뽄”

소설. 아쿠타가와상 후보, 미시마상 후보에 오른다.


2002년 영화 “home”

은둔하는 형을 동생이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화.


2003년 모로보시 노아 (히키코모리 당사자)

“히키코모리 세키라라라”를 출판.


2003년 NHK “히키코모리 서포트 캠페인”


2003년 무라카미 류 “공생충”.

“지상에서의 마지막 가족”과는 다른 분위기의 히키코모리에 관한 소설.


2004년 “히키코모리”에서 “니트”로 사회의 관심이 옮겨간다.

“일하면 지는 것”이라 말한 청년의 말이 계기.

니트 붐은 그 후 pha(파) 등의 저명인을 낳는다. (*3)



*2. 본지 HIKIPOS의 시리즈 “히키코모리 명인이 된 나”에 출연했다.

http://www.hikipos.info/entry/2017/12/26/190000


*3 이 연표의 작성에는

청년실업가, 히키코모리 작가이신 사토 마나부의

facebook 투고를 일부 참고하였다.


이렇듯이 전문가, 당사자 모두

서기 2000년 전후에 「히키코모리」에 관한 사회적인 발언이 많이 이루어졌다.


이쯤 유포된

「히키코모리」

라는 말의 이미지는,

먼저 일본 사회 특유의 산물이고,


부모님의 고생해서 세운 집 2층 가장 안쪽에 있는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고

방문 앞까지 엄마가 식사를 가져오게 하며

게임만 하는 미혼의 젊은 남자



라는 어둡고 제멋대로인 히키코모리 상(像)이다.


이것을 「원형적 히키코모리 상(像)(prototypical image of hikikomori )」이라고 부르겠다.


예컨대 오늘날에는,

이러한 「원형적 히키코모리 상(像)」에 가장 가까운,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 히키코모리는

전체의 히키코모리 중 3%에도 못 미친다고 한다. (*4)


*4.세키미즈 텟페이(関水徹平)『「히키코모리」경험의 사회학(「ひきこもり」経験の社会学)』 左右社, 2016년


하지만, 이 3% 미만을 100%라고 믿는 것이,

그 후 히키코모리에 관한 많은 편향된 말이나 보도를 만들어내는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또한 이 2000년 전후는

그 상(像)을 뒷받침하듯이, 어둡고 제멋대로인 「히키코모리」와 관련된 사건이 이어졌다.

예를 들어 이러한 사건이다.


1999년 교토 초등학생 살인 (테루쿠노하노루) 사건

 학교 교육에 불만을 가진 21살 재수생이 초등학교 2학년생을 교정에서 살해 

2000년 니시테츠 버스 납치 사건

 17살 히키코모리 청년이 버스를 탈취해 무차별 살인 

2000년 니가타 소녀 감금 사건

 28살 히키코모리 청년이 당시 9살이었던 소녀를 자택에서 9년 이상이나 감금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저런 게 히키코모리구나」

라고 일반 시민들은 생각하게 되고,

기분 나쁘고, 두렵고, 성가신

부정적인 존재로의 히키코모리 상(像)이 강해져 갔다.


도쿄도가 오랫동안 히키코모리 대책 담당 부서를

현재의 「복지국」이 아닌 

「청소년 치안 대책본부」에 두고 있었던 것은

그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편향되어 굳어져 간 「히키코모리」상(像)


사회가 갖는 인식은 대부분 재귀적(reflective)으로 형성된다.

 

이러한 풍조에 따라 결국 일반 시민들은 '히키코모리'에 대해 차별적·모멸적인 감정을 갖게 되고, 그것이 반대로 그러한 시선에 훨씬 예민한 히키코모리를 위축시켰다.

 

이렇듯이 원래 밖에 나가는 것을 힘들어하는 히키코모리들은

더욱더 밖에 나가기 어려워졌다.

 

누군가 강력한 권력을 가진 개별적인 타인에 의해

억지로 집에 감금된 것은 아닌데도,

이웃의 눈에 띄지 않도록 자신이 자신을 감금하는

이른바 히키코모리의 자기 감금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요즘

「나는 "히키코모리"가 아니라 "히키코모리 당한 자"이다」

라고 호소하는 히키코모리 당사자들은, 대체로 이러한 생활 환경을 경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대중매체는 일단 「원형적 히키코모리 상(像)」이 만들어지자, 스스로 그것에 사로잡혀 히키코모리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그다지 발굴하려 하지 않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상당히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종래대로의 「원형적 히키코모리 상(像)」을 재생산하는 그것밖에 생각하지 않았고, 말도 안 되게 그중에는 지금도 그러한 자세를 계속 취하고 있는 매체도 있다.

 

예를 들어, 올해도 몇몇 해외 방송사들이 일본의 히키코모리를 취재하기 위해 도쿄에 왔다.

 

「히키코모리를 촬영하고 싶다. 소개해줘. 」

라고 하길래 나는 그들을 많은 히키코모리가 모여드는

본 잡지 히키포스의 편집 회의 등에 데려가려고 했다.


그러자, 

「그게 아니야. 우리가 찍고 싶은 건 확실히 방에 은둔하고 있는 히키코모리야.」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나, 요즘 대부분의 히키코모리는 이렇게 밖에 나와요. 진실한 모습을 보도하는 것이 단나의 역할 아닌가요? 」

라고 의문을 내비쳐 보였지만,

「노~!노~! 이렇게 밖에 나와서 활동하는 거면, 보통 젊은이와 같잖아. 이런 영상을 가지고 가도 우리 시청자들은 『히키코모리』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까 확실히 방에서 나오지 않는 히키코모리를 소개해줘.」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얘, 도대체 뭐 하러 일본에 온 거야.

게다가, 그건 터무니없는 것이다.


가령 히키코모리 전체의 3% 미만에 불과한

방에서 나오지 않는 히키코모리를 소개한다고 해도,

그런 히키코모리는 해외의 방송 카메라 따위를

자기 방에 들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방에서 나올 수 있는 히키코모리」가

방송 취재를 위해 「방에서 나가지 못하는 히키코모리」를 일부러 연기해서,

어떻게든 토산품인 영상을 쥐여주고 나라로 돌려보냈다.


히키코모리 당사자들의 연기로

히키코모리 보도를 성립시키고 있는 것이

해외 취재에 대한 대응의 현실이다.


정말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을 받고 싶어질 정도이다.


이러니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일본 히키코모리의 실상이 국제사회에 전해지지 않을 만도 하다.


그런데 이런 편견은 대중매체 관계자뿐만 아니라,

많은 일반 시민, 심지어는 당사자 중에도 있다.


히키코모리 당사자가 TV에 나오면,

「저건 히키코모리가 아니야. 

히키코모리라면 TV에 나갈 수 없을 거야」

라고 하는 다른 히키코모리 당사자가 나타나기도 한다.


설령 그 사람이 한 발짝도 밖을 나가지 못해도, 히키코모리가 모두 그 사람과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지만….


결국 그런 비판은 어둡고 제멋대로인 「원형적 히키코모리 상(像)」을 재생산하는 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여하고 있다.

히키코모리가 자신들의 목을 조르고 있다.


이래서는 얼마나 시간이 지나도

히키코모리의 진실이 일본 내에조차 침투하지 않기는커녕,

히키코모리 당사자가 직접 사회에 발언할 수도 없게 된다.


그런 가운데 「히키코모리 개념의 확대」가 일어났다.

개나 소나 히키코모리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그 풍조는 폐해도 지적받고 있다.


그래서 다음 회 <후편>에서는, 밖에 나갈 수 없는 히키코모리가, 

히키코모리로서 인정받게 된 과정을 돌아봄과 동시에,

「히키코모리 개념의 확대」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지 생각해 볼 예정이다.



–  <후편>은 다음 6호에 게재됩니다.


…… 이 기사의 일본어 원문,  영어편



〈저자 프로필〉

보솟토 이케이다(ぼそっと池井多) : 아직 “히키코모리”라는 말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았던 1980년대부터 은둔하기 시작해, 이후 은둔의 형태를 바꾸어 가며 간헐적으로 30여년을 은둔하고 있다. 당사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당사자들의 손으로 사회에 송신하는 “VOSOT(보솟토 프로젝트)”를 주재. 약 삼십 년의 히키코모리 인생을 돌아보는 “히키코모리 방랑기”를 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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