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호] "히키코모리"개념의 확대 - 누구나가 히키코모리가 되는 시대를 돌아보다 〈후편〉

“히키코모리”개념의 확대 – 

누구나가 히키코모리가 되는 시대를 돌아보다 <후편> 

(HIKIPOS 2018-12-28호에서 번역·전재)


글 : 보솟토 이케이다      번역 : 함, 홀로(두두 서퍼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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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귀국했을 때의 필자



・・・<전편>에서 이어짐


'히키코모리' 개념의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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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고생해서 세운 집 2층 가장 안쪽에 있는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고

방문 앞까지 엄마가 식사를 가져오게 하며

게임만 하는 미혼의 젊은 남자




 <전편>에 자세히 말해 왔듯이,

2000년 전후에 이러한 “원형적 히키코모리 상(像)”이 만들어지고,

이후 오늘날까지 꿋꿋하게 국내외에 침투했다.


하지만, 최근 2,3년은

아래와 같이 히키코모리의 이미지를 특정하고 있던 제한이 점점  빗나가고있다.

“젊지 않아도 히키코모리”

“남자가 아니라도 히키코모리”

“결혼했어도 히키코모리”

“아이가 있어도 히키코모리”

“방에서 나올 수 있어도 히키코모리”

“다양한 활동을 해도 히키코모리”

“취업해서 일하고 있어도 히키코모리”

“일본 이외의 나라에서도 히키코모리”


왜냐하면 , 지금까지의 히키코모리 성립요건이 부정되는 히키코모리 사례가, 하나씩 “발견””지적”또는”커밍아웃”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서, 사람들은 “히키코모리”의 개념을 확대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에 더불어, 공공의 히키코모리 지원 대책도 범위를 넓히게 되었다.

 

예전의 “히키코모리”에서 “사회적 히키코모리”가 됨으로써

대상이 되는 범주가 늘어났지만, 지금은 더 확대되어

2018년 12월 현재,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생겨났다.

 

주관적 히키코모리

행동・생활 등에서 객관적으로는 히키코모리로 보이지 않아도, 본인이 히키코모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심성 히키코모리

겉으로는 그렇게 보여도, 안으로는 히키코모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근로 히키코모리

이미 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지만, 직장에서 자기방만 줄곧 왕복하고, 다른 인간관계가 없다. “포스트 취업 히키코모리(포스히키)”라고도 함.


히키코모리 친화군

은둔한 경험은 없지만, 언제 은둔할 지 모르기때문에, 자신은 자신을 히키코모리의 마음을 안다(고 주장한다).


히키코모리 계열

히키코모리는 아니지만, 어쩐지 히키코모리 같은 사람.


히키코모리 미만

히키코모리까지는 아니지만, 사회에서 동떨어져 갈 곳을 잃은 사람. (이케가미 마사키씨에 따름)



표현의 각도나 자세한 부분은 다르지만,

모두 비슷한 것을 말하고자 하는 숙어가 아닐까.



구태여”히키코모리”의 지위를 선택하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어째서 이렇게나 사람들은 히키코모리가 되고싶어하는가”

라는 형태의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다.

 

“히키코모리 인가, 히키코모리가 아닌가, 그 미묘한 경계선에 위치하는 것이라면, 일부러 사회적으로 멸시받고 있는 히키코모리에 스스로를 집어넣지는 않을텐데 “라는 사고이다.


나도 그런 의문을 받은 당사자의 한사람이다.

 

히키코모리로서 대중 매체의 취재를 받고

게다가 TV에 나가거나 하면 금세

“그렇게 밖에 나갈 수 있으니까, 

딱히 이제와서 『히키코모리 당사자』라고 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

와 같은 말을 듣기도 한다.

 

그렇군, 밖에 나와있을 때의 나만 본다면,

당연히 그런 의문이 생길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밖으로 나가는 것은 비일상이다.

옛날부터 일본에서 전해져오는 “하레(ハレ : 비일상)”와 “케(ケ : 일상)”로 말하자면, 외출은 “하레(ハレ : 비일상)”의 시간인 것이다.

그들은 방 안에서 자거나, 움직이지 못하는 일상의 나, “케(ケ : 일상)”의 나를 보지 않았다.

 

일상의 나는 나만이 보고있다.

그러니까 그럴 마음만 먹으면 숨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터 사회에 멸시받고 있는

“히키코모리”라는 입장을 선택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왜인가.

 

“사회적 약자 편에 있고 싶어서”

 

라고 답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건 나는 도저히 부끄러워서 말 할 수 없다. 

 

정말로 사회적 약자 편에 있고 싶었다면,

사회제도 전체에서 소외되고 있을 법한 하위층의 당사자,

나라고 하는 “서벌턴(Subaltern)적 당사자”를 사회 자원으로 연결하는 등

얼마든지 해야 할 것이 있다.

그런 것을 하지 못하는 무능무력을 스스로 알고 있다.

 

게다가

 

“사회적 약자 편에 있고 싶어서”

 

와 같은 동기부여를 주창하는 것은

결국은 자신보다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구경거리로 해서,

자신이 사회로부터의 관심을 받으려는 계획인 것이 왕왕 있다.

 

히키코모리 당사자라고는 해도

결국은 자아(에고)에 의해서 움직인다.

특히 욕망덩어리 같은 내 경우는

 

“만약 내가 히키코모리로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면, 

내 발언권이 없어진다”

라는 두려움이 배후에 있다.

 

발언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히키코모리”라는 아이덴티티를 선택했다.

라고 하면 확실히 과장된 말이지만,

“히키코모리가 아닌 자”

로서 발언하는 것은,

아무래도 자신의 현 상황과 말 사이에 무리가 더해지는 것 같다.

 

또, 그러한 발언을 못하게 되는 것은,

사회로부터 케어받을 수 있는 여지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 같은 두려움과 이어져있다.

 

실제로 만약 현재 그런 사회로부터 케어를 받지 않고 있어도,

저금처럼 장래에 받을 수 있는 여지는 남겨두고 싶다

는 인색한 마음이 있기도 하다.

 

이들은, 외관적으로 “히키코모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히키코모리”라는 아이덴티티를 선택했다

많은 당사자・경험자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듯,

“히키코모리””히키코모리가 아님”

과, 어느쪽도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가,

“히키코모리”

라는 아이덴티티를 선택하는 심층심리를 분석하면,

다분히 고식한 이유에 도달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발언에 의해서,

지금까지 히키코모리의 사회적 지위가

상당히 개선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그건 꼭 

“그것은 고식이다”고 

나쁘게만 말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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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키코모리”의 인플레이션


이처럼 “히키코모리” 개념이 확대해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마는,

그러자 이번에는 그 확대가 문제가 되어 왔다.


“히키코모리”의 개념이 넓어지면서

일부러 “히키코모리”라는 개념을 설정한 의미가 희박해져 간다는

우려를 불러오게 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주장은 주로 이렇다.


계속해서 “히키코모리”의 범위를 넓혀가면

“나는 히키코모리다”라고 하면 지원의 대상이 되리라 보고,

“히키코모리”를 유행으로 생각하여 편승하게 되어,

극성스런 사람들 모두가 “히키코모리”를 지칭하는,

말하자면 “히키코모리로 위장”하는 일이 늘어날 것이 아닌가.


그렇게 조만간 모든 인간이

“히키코모리”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위해

“히키코모리”

라는 어휘를 만들었는가.


이렇게 되면

진짜로 지원이 필요한 ”히키코모리”에게

지원이 닿지 않게 되는 것 아닌가.


이와 같은 목소리 뒤에는 이러한 비관론도 나온다.


그러니까 애초에

처음부터 “히키코모리” 같은 말을

만들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구별은 결국 차별을 낳는다.

“히키코모리” 와 같은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히키코모리”도 차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히키코모리를 둘러싼 현상의 일면만을 본다면

확실히 이것들은 다시 한 번 새겨들어야 할 의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히키코모리라는 현상은 실로 다면적이므로

바라보다 보면

시점은 어차피 일면적이 되기 쉽다는 부분도 있다.


조금 더 넓은 시야에서 바라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히키코모리”에 한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멸시 받고 있는

모든 낙인들에게도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본다만,

“히키코모리”가 아닌 사람이

일부러 “히키코모리”를 자칭할 때에는

반드시 마음 속 깊은 부분에 이유가 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지고 있는 상처가

타인의 눈에 비치는 곳에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그 아픔을 괴로워 할 수가 없다.


거기서, 이미 사회에 통용되는 부정적인 인식을

스스로 붙이는 것으로 인해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상처의 아픔에 괴로워 할 권리를 자신에게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결국에 “히키코모리”를 '사칭'하는 사람들과

진짜 “히키코모리”인 사람들은

같은 문제를 공유할 수 있는 지점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양쪽 모두 마음에 상처를 입은 동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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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키코모리”라는 말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렇게 〈전편〉, 〈후편〉 2회 시리즈를 돌아 보면

헤이안 시대인 옛날부터 일본어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히키코모리”라는 특별할 것 없는 단어가

1980년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아 사회로 나오게 됨으로 인해

지금은 “히키코모리”라는 어휘를 둘러싸고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애초에 새로운 의미의 “히키코모리”라는 말을

만들지 않았으면 좋았던 것일까?


앞서 서술했듯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그리고 그 의견도 나는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은

새로운 의미, 즉 오늘날 사용되는 의미에서의 “히키코모리”

라는 말이 세상에 나오게 되어서

총체적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메리트와 디메리트를 정산해보면

나에게 있어서는 메리트가 흑자로 나온다.


그 이유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나에게

요즘 말하는 “히키코모리”가 시작되었을 무렵,

“히키코모리”라는 편리한 말이 없었기 때문에

굉장히 고생했다.


“굉장히 고생했다”

라고만 써버리면

많이 가벼워지지만

인생이 너무나 막혀 죽어 버릴까 생각할 정도로

곤경에 빠져있었다.


취직도 못해, 방에서 나가지도 않아,

그러한 자신의 상태를

어떻게 주변에 말하면 좋을 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다” 보다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다른 이들에게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 길이 없었다.


말이 없었다.

단어가 없었다.

설명할 수 없었다.


그렇다 보면

비록 그 말의 정의가 애매하더라도

“히키코모리”라는 말이 하나 있는 것만으로

상황은 많이 달라진다.


물론, 말이 있어도

자신이 그것이라고 인정하기까지는

하나의 허들을 넘어야만 하겠지만,

1980년대 당시의 나에게

지금의 “히키코모리”라는 어휘가 있었다면

나를 어딘가로 데리고 나가려고 온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나, 잘은 모르겠지만

히키코모리가 되어 버렸어.”


그 말로 인해

친구들에게는 무시 당할지는 모르나,

그것으로 일단 친구들은

내가 어떠한 상태인지를 대략 파악할 것이다.


비록 “이해”는 하지 못해도, “파악”은 하겠지.


일단은 그것으로 좋았다.

그들이 나를 두고 나가 준다.

이것이 움직일 수 없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제 1단계의 해결인 것이다.


“외로움과 고독은 어떡하는가”

같은 건 좀 더 고도의 단계의 해결이라고 생각한다.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때에는

남겨짐으로 인한 “외로움” 보다도

억지로 끌려 나가는 쪽이 몇 배나 괴롭다.


나는 주위 사람에게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는 어휘가 없었기 때문에

내몰려 극단적으로 반대쪽까지 닿아


“아프리카에 가서 죽자”(*5)


는 별난 생각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5. 참조 “히키코모리 방랑기 제 4회”

 http://www.hikipos.info/entry/horoki_r4_jap



이윽고 사라져 가는 말이라 할지라도


그러니까, 나는 개인적으로는

역시 “히키코모리”라는 말이 탄생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차별에는 싸워가면 된다.


투쟁에서 오는 고통은

그 말이 없어 표현할 수 없었을 적의 고통에 비하면

내게는 아직 작은 것에 불과하다.


앞으로도 히키코모리의 개념이 더욱 넓어져

그에 따라 히키코모리의 의미도 막연해져 갈지도 모른다.


어쩌면 히키코모리라는 말이

계속 존재할 의미가 없을 정도로

히키코모리라는 어휘가 확대되어 갈지도 모르나,

만일 그렇다 할지라도

일시적으로 라도 “히키코모리”라는 말은

“있어서 다행이었다”

고 나는 생각한다.


일시적으로 있어서 다행이었다는 것은

이윽고 사라져도 “다행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마침 수학의 도형 문제에 있는 “보조선”과 같은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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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풀기 위해

거기에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풀어지기 시작하면

그 보조선은 이제 필요 없다.


또한 “히키코모리”라는 개념이 넓어져 버리면

“너도 히키코모리, 나도 히키코모리”

라는 형태가 되어

사실은 “평범한 사람” 중에서도


“히키코모리적인 부분이 있다”


는 것이 이해되어 갈 것이고,

이는 결국


“히키코모리를 매도하면 안 돼”

“히키코모리는 문제가 아니야”

“히키코모리를 억지로 움직이게 해도 소용없어”


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히키코모리”라는 말을 내가 지금 한창 쓰고 있는 것도


“히키코모리라는 것은 인간사회에 편재하는 인구층이며

지금처럼 문제로 여길 필요는 없다”


는 것을 이윽고 사회가 인식할 수 있게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사회가 히키코모리를 문제 삼지 않게 되도록

지금 나는 “히키코모리”라는 말을 쓰고 있다.


(완)


…… 이 기사의 일본어원문영어편



〈저자 프로필〉

보솟토 이케이다(ぼそっと池井多) : 아직 “히키코모리”라는 말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았던 1980년대부터 은둔하기 시작해, 이후 은둔의 형태를 바꾸어 가며 간헐적으로 30여년을 은둔하고 있다. 당사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당사자들의 손으로 사회에 송신하는 “VOSOT(보솟토 프로젝트)”를 주재. 약 삼십 년의 히키코모리 인생을 돌아보는 히키코모리 방랑기를 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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