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6.18.수
오후 3시쯤 서울에서 오신 한 분과 함께 제주 두더집 텃밭에 나가 감자꽃을 따 주었다. 꽃을 따 주어야 감자 씨알이 굵어진다고.ㅋ

그러고선 바로 함덕 바다로 넘어갔다. 올해 처음으로 빠지는 바다. 원래 물을 무서워해서 그런지 역시나 바다가 쉽지만은 않았다. 물이 차갑고 두려움에 발은 뜨지 않고. 그래도 작년에 끊임없이 도전하던 게 있어서 그런지 뒤로 눕기는 금방 되었다ㅎ 뭐든 많이 해 보는 것 앞엔 장사 없으리. 많이 해 보는 것만이 두려움을 없앤다. 무대가 있는 그런 자리에 많은 사람 앞에서 내 얘기를 하는 것 또한 계속 접해 보면 분명 아무렇지 않아지겠지만 아직은 주저함이 크다.
(. . .)
리트릿의 '꽃'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다. 밤마다 나누는 대화의 시간! 오늘은 왜 은둔고립을 하였는지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의 이야기가 오 가고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모르게 막 내 얘기를 하고 나니 이 얘기에 대해 글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
잘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던 스물한 살의 나는 엄마가 원하는 공무원이 되기로 한다. 고시반에 들어가면 기숙사 무료에 인강비까지 지원해 준다기에 대학 입학 새내기부터 공부에 돌입하였다. 공부를 별로 잘하지 못했던 나는, 효율적인, 시험에 붙을 그런 공부 방법을 알지 못했기에 매번 낙방하는 시험에 스스로를 탓하며 한없이 작아져 갔다. 공부하고 슬럼프를 겪고 공부하고 슬럼프를 겪고. 대학 생활 내내 내가 하던 거라곤 그것뿐이었다.
매해 공부를 당연시여기며, 쉬는 것조차 마음 편히 쉬지 못했지만 결과는 나오지 않으니 스스로를 한심한 존재로 여겼다. 너무 안 되니 중간에 (교수님 추천으로) 법무법인도 취직해 보고, 나중에는 (내 블로그를 보고 나를 취업시켜 준) 글 쓰는 업무를 하는 매트리스 회사에도 가 보았지만 오래 버티진 못했다. 또래와 생활하는 그 공간에 숨이 막힐 듯했고, 일도 잘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아 그런 환경은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 스스로를 '나는 사무직에 맞지 않는 인간'이라고 단정짓고 육체적으로 힘든 일만 찾아 해댔다. '회사에 취직' 하는 게 일반적인 루트겠지만 남들 스펙 쌓을 시간에 공무원 공부만 했으니, 하다 못해 토익 점수 하나 없는 내 이력서를 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오래 버틸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그러니 나는 줄곧 그 '취업'을 피하려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분명 어딘가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 굳게 믿으며ㅡ.
공부만 하면 게을러질 게 뻔하니 낮엔 일을 했다. 낮엔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하고 밤엔 공부를 하고.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를 가 보면 뭔가 있을까 했지만 코로나가 터져 가지도 못하고, 그렇다면 조금은 더 수월한 군무원을 준비해 볼까 하여 시작했다 일하는 현장에서 내가 버틸 수 없을 거란 생각에 포기하고, 영어를 좋아하고 글 쓰는 걸 좋아하니 출판번역에 도전했다 턱없이 부족한 실력에 포기하고. 도전포기도전포기도전포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없어 보였다. 그렇게 30대 초반이 되고 그 나이 되도록 나만 '무엇이라 말할' 그런 것이 없다는 생각에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친구들의 연락을 무시하고 차단을 반복한 것도 다 열등감 때문이라ㅡ.
이러한 현실은 스스로를 더 방 안에 가두었다. 내겐 없을 것 같은 미래가 자각이 되거나 사람 사이에서 조금만 상처를 입으면 불안이 찾아왔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23년 8월에도 한 달 동안 내리 잠만 자며 생활하고 있는데, 동생이 같이 해 보자며 네이버 밴드에서 참여할 수 있는 온라인 프로그램을 내밀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은둔고립 지원 단체에서의 활동이. 그 한 달 동안 나는 많은 힘을 얻었고, 그 힘에 사회복지사라는 자격증에도 도전케 했다. 그럼에 봉사를 하고 싶은 마음에 생각하다 우연히 은둔고립과 관련된 단체에서 해 볼 수 있는 봉사를 발견했고, 지원하게 되었다. 그것이 두더집과의 첫 만남이었다.
24년 4월 '발굴단'이라는 봉사를 하러 왕복 4시간의 거리를 매주 토요일마다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서울 두더집에서의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가 너무도 낯설어 그곳이 많이 불편했다. 마스크를 벗지 않았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냥 모든 것이 낯설어 힘이 들었던 것 같다.
명색이 '봉사'라는 이름으로 갔지만 사실상 내가 도움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따뜻한 사람들이 많았던 그곳에선 더 이상 경계를 세울 필요가 없었고, 낯설었던 그 공간은 점차 익숙해져 갔다. 그곳이 편해지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내 상태에 변화가 일었다.
그해 7월, '제주리트릿'이라는 프로그램이 처음으로 생겼다.
'제주'
잘 나다니지 않았던 나에겐 누구나 흔히 가던 '제주'도 낯선 곳이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가 보고선 한 번도 안 갔으니까. 그래서 가고 싶었다. 그냥 새로운 환경에 나를 던지고 싶었다.
그해 8월엔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이 나올 예정이었다. 그래서 부단히 이력서를 내야 할 시기였는데, 내가 이걸 진정으로 원하는지 확신이 안 섰다. 그저 남을 도와주는 게 좋아서 누군가에게 베푸는 게 좋아서 시작한 자격증이었기에 이걸 업으로 살아가야 할지 그 시작을 앞둔 시점에서 망설임이 찾아왔다. 사실 해 보고 판단하는 게 맞았지만 피하고 싶었다. 여태껏 피해 왔던 '취업'이었으니까, '사회복지'라고 해서 '사무직'이 아닌 건 아니었으니까. 단순히 돕는 걸 좋아한다는 이유는 내게 걸림돌 같이 쌓여 있던 이것들을 깨기엔 어려웠다. 그래서 피하고 싶었다. 피하고 그냥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싶었다. 내가 그간 계속 헤매이던 '내가 정말 좋아할 수 있는 그 일'을 찾고 싶었다. 20대 내내 공부만 했기에 경험이 부족해 못 찾는 건가 싶었기에 제주라는 '새로운 환경'은 마음을 움직일 무언가가 되었다. 그래서 무작정 그해, 24년 8월에 워홀을 가려고 저축했던 돈과 커다란 여행 가방만 들고 제주로 내려갔다.
몇 주가 지나자 현실을 깨달았고, 정말 무서웠음에 육지로 가고 싶었지만 어찌어찌 버텨 지금까지 왔다.
거의 1년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제주라는 선택을 되짚어 보자면, 잘한 선택이다 싶다. 그동안 육지에서는 겪어 보지 못할 정말 다양하고도 많은 경험을 했고, 그 속에서 내가 몰랐던 나를 너무도 많이 발견했으니까. 하나하나 다 나열할 수는 없지만 가장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나도 가치 있는 존재'임을 깨달았다는 것. 스스로를 사회에 쓸모없는 무가치한 인간으로 여겼던 내가, 지금에 와서는 '나도 가치로운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게 최근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변화인 듯싶다.
제주에는 뭔가 있을까 싶어 왔지만, 그걸 찾지 못한 건 여전하다. 그러기에 이따금 미래에 대한 불안이 올라올 때면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내내 잠만 자는 날도 있다. 하지만 이전보단 그런 날이 길진 않다. 이제는 현재를 살기로 다짐했으니까. 뭐, 이전에도 현재를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더더욱 현재를 살고자 하니까. 지금 내게 오는 상황에 맞춰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ㅡ. 정적인 사무직보단 육체적으로 움직이는 활동을 더 좋아하는 나는 앞으로 돌집 짓는 과정을 배워 볼 것이고ㅡ, 글을 쓸 때 제일 행복한 나는 앞으로 책을 낼 것이다. 그 과정의 기록을 꾸준히 지켜봐 주시길.
나를 돌아보게 하는 이 시간이 참 좋다.

25.06.18.수
오후 3시쯤 서울에서 오신 한 분과 함께 제주 두더집 텃밭에 나가 감자꽃을 따 주었다. 꽃을 따 주어야 감자 씨알이 굵어진다고.ㅋ
그러고선 바로 함덕 바다로 넘어갔다. 올해 처음으로 빠지는 바다. 원래 물을 무서워해서 그런지 역시나 바다가 쉽지만은 않았다. 물이 차갑고 두려움에 발은 뜨지 않고. 그래도 작년에 끊임없이 도전하던 게 있어서 그런지 뒤로 눕기는 금방 되었다ㅎ 뭐든 많이 해 보는 것 앞엔 장사 없으리. 많이 해 보는 것만이 두려움을 없앤다. 무대가 있는 그런 자리에 많은 사람 앞에서 내 얘기를 하는 것 또한 계속 접해 보면 분명 아무렇지 않아지겠지만 아직은 주저함이 크다.
(. . .)
리트릿의 '꽃'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다. 밤마다 나누는 대화의 시간! 오늘은 왜 은둔고립을 하였는지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의 이야기가 오 가고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모르게 막 내 얘기를 하고 나니 이 얘기에 대해 글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
잘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던 스물한 살의 나는 엄마가 원하는 공무원이 되기로 한다. 고시반에 들어가면 기숙사 무료에 인강비까지 지원해 준다기에 대학 입학 새내기부터 공부에 돌입하였다. 공부를 별로 잘하지 못했던 나는, 효율적인, 시험에 붙을 그런 공부 방법을 알지 못했기에 매번 낙방하는 시험에 스스로를 탓하며 한없이 작아져 갔다. 공부하고 슬럼프를 겪고 공부하고 슬럼프를 겪고. 대학 생활 내내 내가 하던 거라곤 그것뿐이었다.
매해 공부를 당연시여기며, 쉬는 것조차 마음 편히 쉬지 못했지만 결과는 나오지 않으니 스스로를 한심한 존재로 여겼다. 너무 안 되니 중간에 (교수님 추천으로) 법무법인도 취직해 보고, 나중에는 (내 블로그를 보고 나를 취업시켜 준) 글 쓰는 업무를 하는 매트리스 회사에도 가 보았지만 오래 버티진 못했다. 또래와 생활하는 그 공간에 숨이 막힐 듯했고, 일도 잘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아 그런 환경은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 스스로를 '나는 사무직에 맞지 않는 인간'이라고 단정짓고 육체적으로 힘든 일만 찾아 해댔다. '회사에 취직' 하는 게 일반적인 루트겠지만 남들 스펙 쌓을 시간에 공무원 공부만 했으니, 하다 못해 토익 점수 하나 없는 내 이력서를 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오래 버틸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그러니 나는 줄곧 그 '취업'을 피하려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분명 어딘가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 굳게 믿으며ㅡ.
공부만 하면 게을러질 게 뻔하니 낮엔 일을 했다. 낮엔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하고 밤엔 공부를 하고.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를 가 보면 뭔가 있을까 했지만 코로나가 터져 가지도 못하고, 그렇다면 조금은 더 수월한 군무원을 준비해 볼까 하여 시작했다 일하는 현장에서 내가 버틸 수 없을 거란 생각에 포기하고, 영어를 좋아하고 글 쓰는 걸 좋아하니 출판번역에 도전했다 턱없이 부족한 실력에 포기하고. 도전포기도전포기도전포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없어 보였다. 그렇게 30대 초반이 되고 그 나이 되도록 나만 '무엇이라 말할' 그런 것이 없다는 생각에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친구들의 연락을 무시하고 차단을 반복한 것도 다 열등감 때문이라ㅡ.
이러한 현실은 스스로를 더 방 안에 가두었다. 내겐 없을 것 같은 미래가 자각이 되거나 사람 사이에서 조금만 상처를 입으면 불안이 찾아왔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23년 8월에도 한 달 동안 내리 잠만 자며 생활하고 있는데, 동생이 같이 해 보자며 네이버 밴드에서 참여할 수 있는 온라인 프로그램을 내밀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은둔고립 지원 단체에서의 활동이. 그 한 달 동안 나는 많은 힘을 얻었고, 그 힘에 사회복지사라는 자격증에도 도전케 했다. 그럼에 봉사를 하고 싶은 마음에 생각하다 우연히 은둔고립과 관련된 단체에서 해 볼 수 있는 봉사를 발견했고, 지원하게 되었다. 그것이 두더집과의 첫 만남이었다.
24년 4월 '발굴단'이라는 봉사를 하러 왕복 4시간의 거리를 매주 토요일마다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서울 두더집에서의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가 너무도 낯설어 그곳이 많이 불편했다. 마스크를 벗지 않았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냥 모든 것이 낯설어 힘이 들었던 것 같다.
명색이 '봉사'라는 이름으로 갔지만 사실상 내가 도움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따뜻한 사람들이 많았던 그곳에선 더 이상 경계를 세울 필요가 없었고, 낯설었던 그 공간은 점차 익숙해져 갔다. 그곳이 편해지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내 상태에 변화가 일었다.
그해 7월, '제주리트릿'이라는 프로그램이 처음으로 생겼다.
'제주'
잘 나다니지 않았던 나에겐 누구나 흔히 가던 '제주'도 낯선 곳이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가 보고선 한 번도 안 갔으니까. 그래서 가고 싶었다. 그냥 새로운 환경에 나를 던지고 싶었다.
그해 8월엔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이 나올 예정이었다. 그래서 부단히 이력서를 내야 할 시기였는데, 내가 이걸 진정으로 원하는지 확신이 안 섰다. 그저 남을 도와주는 게 좋아서 누군가에게 베푸는 게 좋아서 시작한 자격증이었기에 이걸 업으로 살아가야 할지 그 시작을 앞둔 시점에서 망설임이 찾아왔다. 사실 해 보고 판단하는 게 맞았지만 피하고 싶었다. 여태껏 피해 왔던 '취업'이었으니까, '사회복지'라고 해서 '사무직'이 아닌 건 아니었으니까. 단순히 돕는 걸 좋아한다는 이유는 내게 걸림돌 같이 쌓여 있던 이것들을 깨기엔 어려웠다. 그래서 피하고 싶었다. 피하고 그냥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싶었다. 내가 그간 계속 헤매이던 '내가 정말 좋아할 수 있는 그 일'을 찾고 싶었다. 20대 내내 공부만 했기에 경험이 부족해 못 찾는 건가 싶었기에 제주라는 '새로운 환경'은 마음을 움직일 무언가가 되었다. 그래서 무작정 그해, 24년 8월에 워홀을 가려고 저축했던 돈과 커다란 여행 가방만 들고 제주로 내려갔다.
몇 주가 지나자 현실을 깨달았고, 정말 무서웠음에 육지로 가고 싶었지만 어찌어찌 버텨 지금까지 왔다.
거의 1년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제주라는 선택을 되짚어 보자면, 잘한 선택이다 싶다. 그동안 육지에서는 겪어 보지 못할 정말 다양하고도 많은 경험을 했고, 그 속에서 내가 몰랐던 나를 너무도 많이 발견했으니까. 하나하나 다 나열할 수는 없지만 가장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나도 가치 있는 존재'임을 깨달았다는 것. 스스로를 사회에 쓸모없는 무가치한 인간으로 여겼던 내가, 지금에 와서는 '나도 가치로운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게 최근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변화인 듯싶다.
제주에는 뭔가 있을까 싶어 왔지만, 그걸 찾지 못한 건 여전하다. 그러기에 이따금 미래에 대한 불안이 올라올 때면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내내 잠만 자는 날도 있다. 하지만 이전보단 그런 날이 길진 않다. 이제는 현재를 살기로 다짐했으니까. 뭐, 이전에도 현재를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더더욱 현재를 살고자 하니까. 지금 내게 오는 상황에 맞춰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ㅡ. 정적인 사무직보단 육체적으로 움직이는 활동을 더 좋아하는 나는 앞으로 돌집 짓는 과정을 배워 볼 것이고ㅡ, 글을 쓸 때 제일 행복한 나는 앞으로 책을 낼 것이다. 그 과정의 기록을 꾸준히 지켜봐 주시길.
나를 돌아보게 하는 이 시간이 참 좋다.